『안녕, 미누』와 「暴力を見続けるもの」를 중심으로

1. ‘폭력을 계속 바라본다’는 말의 의미
望月優大의 「アジアとアメリカのあいだ 第14回 暴力を見続けるもの」를 읽으며 가장 오래 남은 표현은 제목 그대로 “폭력을 계속 바라본다”는 말이었다. 처음 이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폭력은 멈추어야 하는 것이지, 계속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폭력의 장면을 보고 있다. 전쟁, 추방, 시위, 범죄, 재난, 차별의 장면은 뉴스와 SNS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폭력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는 ‘바라봄’은 단순히 폭력의 장면을 많이 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을 자극적인 사건으로 소비하는 태도와는 다르다. 오히려 권력이 감추려는 사실, 사회가 빨리 잊고 싶어 하는 고통, 뉴스의 속도 속에서 쉽게 사라지는 사람들의 삶을 끝까지 응시하는 태도에 가깝다. 다시 말해, “폭력을 계속 바라본다”는 것은 끔찍한 장면을 반복해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폭력이 왜 발생했는지, 누구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보도 속에서 지워지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이 글은 칠레 산티아고에서 마주한 베네수엘라 이주민의 모습에서 출발한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찾아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 위기 속에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칠레 사회에서 이주민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기보다 치안과 국경 관리의 대상으로 다뤄진다. 이 지점에서 나는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자들을 떠올렸다. 남미의 이야기는 멀리 있는 사건처럼 보였지만, 이주민을 필요로 하면서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모습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노동력으로는 필요하지만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
한국 사회는 이미 이주노동자의 노동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 농촌, 어촌, 공장, 조선업, 건설 현장, 음식점, 돌봄 노동의 현장 곳곳에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 사용하는 물건, 도시 밖 산업 현장의 많은 부분은 이들의 노동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자주 잊는다. 일손이 부족할 때는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사회적 갈등이나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불법체류자”, “외국인 범죄”, “치안 불안”이라는 말이 먼저 등장한다. 이주민은 필요할 때는 노동력으로 불리고, 불안할 때는 위험 요소로 불린다.
이러한 시선의 문제는 미디어 보도에서도 나타난다. 미디어는 이주민의 삶을 꾸준히 보여주기보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들을 갑자기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특히 범죄나 갈등과 연결될 때 이주민은 한 사람의 삶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사회 문제의 원인처럼 보이기 쉽다. 물론 범죄나 불법 체류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다. 국가는 체류 질서와 공동체의 안전을 관리해야 하고, 지역 주민의 불안도 실제 정책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사건을 근거로 이주민 전체를 위험한 집단처럼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그것은 개인의 행위와 집단 전체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고, 이주민을 언제든 배제해도 되는 존재처럼 보이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주민을 동정의 대상으로만 보지도 않고, 불안의 대상으로만 보지도 않는 태도이다. 이주민은 무조건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라는 식의 단순한 접근도 충분하지 않고, 반대로 이들을 치안 문제의 원인으로만 보는 접근도 위험하다. 우리는 더 복잡하게 보아야 한다. 왜 그들이 고향을 떠났는지, 한국 사회는 왜 그들의 노동에 의존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어떤 제도 속에서 일하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권리가 제한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이 사건을 소비하는 시선과 구조를 읽는 시선의 차이다.
3. 『안녕, 미누』가 보여준 한 사람의 시간
이 문제를 나에게 더 구체적으로 느끼게 한 작품이 다큐멘터리 『안녕, 미누』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미누, 본명 미노드 목탄은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18년을 살았다. 18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한 사람이 언어를 익히고, 관계를 만들고, 기억을 쌓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미누는 한국에서 일했고, 한국어를 사용했으며, 한국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또한 이주노동자 밴드 ‘스톱크랙다운’의 멤버로 활동하며 이주민의 권리를 외쳤다. 그는 단순히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이미 한국 사회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미등록 체류자’라는 이유로 강제 추방되었다. 한국에서 보낸 18년의 시간과 관계는 행정적 낙인 하나로 쉽게 지워졌다. 나는 이 지점에서 ‘합법’이라는 말이 항상 정의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법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체류 자격과 출입국 관리도 국가가 운영해야 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법이 한 사람의 삶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때, 법은 보호의 장치가 아니라 배제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미누에게 가해진 폭력은 총이나 무기처럼 눈에 보이는 폭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시간, 그가 맺은 관계, 그가 만들어 온 정체성을 한순간에 끊어 버렸다는 점에서 매우 깊은 폭력이었다.
이것은 모치즈키가 말한 “폭력을 계속 바라본다”는 태도와 연결된다. 폭력은 반드시 피가 흐르는 장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행정 절차, 단속, 추방, 침묵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폭력일수록 더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법대로 처리했다”는 말은 너무 쉽게 모든 질문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질문은 그 다음에 있다. 그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가. 그 법은 누구의 삶을 지우고 있는가. 그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의 시간과 관계는 얼마나 고려되고 있는가. 『안녕, 미누』는 바로 이 질문을 우리 앞에 남긴다.
4. 고용허가제와 구조적 폭력
한국의 고용허가제 역시 이 문제를 보여준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 노동자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제도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한국 사회의 인력 부족을 해결하고, 이주노동자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자유롭게 옮기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어 왔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고용주의 동의가 없으면 열악한 환경에서도 쉽게 벗어나기 어렵고, 임금 체불이나 폭언, 위험한 숙소 문제가 발생해도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 노동자는 한국에 들어와 일하지만, 그가 자신의 노동 조건을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권리는 제한된다.
이 구조는 이주노동자를 동등한 노동자라기보다 특정 사업장에 묶인 인력으로 만든다. 한국 사회는 이들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이 장기적으로 정착하고 권리를 가진 사회 구성원이 되는 것에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노동력은 필요하지만, 그 노동을 하는 사람의 삶은 충분히 보지 않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고용허가제는 단순한 행정 제도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이주민을 어떤 위치에 놓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고용허가제가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입국과 체류, 고용을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장치는 필요하다. 문제는 그 제도가 누구의 편의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는가이다. 만약 제도가 주로 사업주의 인력 확보와 국가의 단기적 노동력 관리에 맞추어져 있다면, 이주노동자의 권리와 삶은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때 이주노동자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할 때 불러오고 기한이 지나면 돌려보내는 자원처럼 취급된다. 이것이 바로 제도 속에 숨어 있는 폭력이다.
5.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서는 보기
이주민 문제는 쉽게 선악 구도로 나뉜다. 한쪽에서는 이주민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강한 단속과 추방을 주장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주민은 모두 약자이므로 단속 자체가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보다 복잡하다. 불법 브로커, 조직범죄, 신원 확인 문제, 지역 주민의 불안은 실제로 존재한다. 동시에 이주민의 노동 착취, 임금 체불, 위험한 숙소, 차별, 강제추방의 문제도 실제로 존재한다. 어느 한쪽만 보면 다른 한쪽의 현실이 사라진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중립이 아니라 더 정확한 바라봄이다. 범죄를 저지른 개인과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주민을 구분해야 한다. 불법 브로커와 착취 고용주는 강하게 처벌해야 하지만, 합법적으로 일하고 살아가려는 이주노동자의 권리는 보호해야 한다. 난민 신청자는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심사해야 하고, 지역 주민의 치안 불안도 실제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배제도 답이 아니고,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는 포용도 답이 아니다. 더 나은 사회는 복잡한 현실을 복잡한 그대로 보려는 사회이다.
모치즈키의 글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폭력을 단순히 한쪽 권력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선과 악을 쉽게 나누는 언어를 경계하고, 그럴듯한 명분 아래 반복되는 폭력을 보라고 말한다. 이주민을 향한 배제는 언제나 치안, 국경, 질서, 경제라는 말과 함께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그 자체로 필요할 수 있지만, 동시에 폭력을 감추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단어를 의심해야 한다. “관리”, “단속”, “보호”, “질서”라는 말이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어야 한다.
6. 미디어는 무엇을 보이게 하고, 무엇을 지우는가
동아시아미디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문제는 결국 미디어의 책임으로 이어진다. 미디어는 사건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사건을 해석하는 틀을 만든다. 어떤 단어를 제목에 쓰는지, 누구의 목소리를 먼저 배치하는지, 어떤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지에 따라 대중의 인식은 크게 달라진다. 이주민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이다. 미디어가 이주민을 주로 범죄, 불법 체류, 치안 불안과 연결해 보여준다면, 대중은 이주민을 위험한 존재로 상상하기 쉽다. 반대로 이주민의 노동 조건, 이동의 배경, 가족과 관계, 차별의 경험을 함께 보여준다면, 우리는 그들을 좀 더 입체적인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녕, 미누』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이주노동자를 숫자나 정책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미누라는 한 사람의 얼굴, 목소리, 시간, 관계를 보여준다. 그는 ‘미등록 체류자’라는 행정적 분류로 설명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노래했고, 사랑했고, 관계를 맺었고, 싸웠고, 그리워했다.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그를 문제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한 사람의 삶으로 바라본다. 이것이 미디어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게 된 사람에게 얼굴과 이름을 돌려주는 일, 그것이 미디어의 윤리적 책임이다.
이와 반대로 사건 중심의 보도는 때때로 이주민을 더욱 보이지 않게 만든다. 보도는 이주민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이미지로만 고정할 수 있다. 불법, 범죄, 단속, 추방의 언어가 반복되면, 그 사람들의 일상과 노동, 감정과 관계는 사라진다. 그래서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화면에 등장시키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 등장시키는가, 어떤 맥락 속에서 말하게 하는가, 누구의 시선으로 설명하는가가 중요하다.
7. 지금 내 위치에서 느끼는 불편함
나는 이 문제를 거창한 국제정치의 문제로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사실 이주민 문제는 내 일상과도 연결되어 있다. 편의점, 식당, 공장, 농촌, 학교 주변에서 우리는 이미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내가 먹는 음식과 사용하는 물건, 누군가의 돌봄과 지역 산업은 이주노동자의 노동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나는 평소에 그들의 삶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숙소에서 자는지, 어떤 말을 듣고 일하는지,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는지, 임금은 제때 받는지에 대해 거의 묻지 않았다.
이 사실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이주민 차별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삶을 제대로 바라본 것도 아니었다. 무관심 역시 어떤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 모치즈키가 말한 “폭력을 계속 바라본다”는 태도는 바로 이 무관심을 흔든다. 폭력이 반복되는 이유는 누군가가 악해서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은 폭력을 정당화하고, 사회는 그것을 익숙한 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쓰는 나의 위치는 단순한 관찰자의 위치가 아니다. 나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주노동자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문제에서 완전히 바깥에 있을 수 없다. 이주민을 향한 차별과 배제가 반복될 때, 그것은 일부 정치인이나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보지 않으려 했던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 사회 안에 있다. 이 자각에서부터 에세이의 질문이 시작된다.
8. 지워진 이름을 기억하는 일
“폭력을 계속 바라본다”는 것은 지워진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미누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단순한 미등록 체류자가 아니라, 한국에서 18년을 살았던 한 사람이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필요로 했지만 끝내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일은 과거의 한 비극을 추모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 곁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또 다른 이주민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묻는 일이기도 하다.
이름이 사라지면 사람은 쉽게 통계가 된다. “외국인 노동자 수”, “불법체류자 수”, “난민 신청자 수”라는 숫자는 필요하지만, 숫자만으로는 삶을 설명할 수 없다. 그 숫자 안에는 고향을 떠난 이유, 한국에서의 노동, 가족과의 거리, 차별의 경험,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 들어 있다. 미디어가 해야 할 일은 숫자를 전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숫자 뒤에 있는 이름과 얼굴, 목소리를 다시 보이게 해야 한다.
미누의 삶은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그는 한국 사회가 만든 제도 속에서 지워졌지만, 다큐멘터리는 그를 다시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와 노래, 동료들과의 관계는 그가 단순히 추방된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것이 기록의 힘이다. 기록은 사라진 사람을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또 다른 미누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9. 사건을 소비하는 사회에서 구조를 읽는 시민으로
결국 이 글이 나에게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뉴스를 보며 사건을 소비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 뒤의 구조를 읽으려는 시민인가. 현대의 뉴스는 빠르다. 자극적인 제목과 강한 이미지, 짧은 영상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분노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비난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빠른 감정은 종종 느린 이해를 방해한다. 이주민 관련 사건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쉽게 “외국인이 문제다” 혹은 “단속이 문제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구조를 읽는 시민이 된다는 것은 사건의 충격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누가 이 구조에서 이익을 얻는지, 누가 보이지 않게 되는지, 어떤 제도가 문제를 만들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이주민 문제를 볼 때도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왜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하는가. 왜 그들을 장기적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주저하는가. 왜 그들의 노동은 가까이 있지만 삶은 멀리 있는가. 왜 미디어는 이들을 주로 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보여주는가.
이 질문은 폭력을 바로 멈추지는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질문이 없으면 폭력은 너무 쉽게 정당화된다. “법대로 했다”, “질서를 지켜야 한다”, “국민 안전이 우선이다”라는 말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삶을 지우는 명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물어야 한다. 그 질서는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그 안전은 누구의 안전인가. 그 법은 누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가. 이것이 폭력을 계속 바라보는 시민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10. 결론: 바라봄은 책임의 시작이다
望月優大의 「暴力を見続けるもの」는 남미의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에도 깊이 닿아 있다. 칠레의 베네수엘라 이주민이 국경과 치안의 문제로 축소되듯, 한국의 이주노동자 역시 노동력과 체류 자격의 문제로 축소되기 쉽다. 그러나 이주민은 숫자나 제도의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시간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일은 감상적인 동정이 아니라, 사회를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안녕, 미누』는 이 사실을 한 사람의 삶으로 보여준다. 미누는 한국에서 18년을 살았지만, 끝내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가 이주노동자의 노동은 필요로 하면서도 그들의 삶은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래서 미누를 기억하는 일은 한 개인을 추모하는 것을 넘어, 지금도 우리 곁에 있는 이주민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묻는 일이 된다.
나는 이주민을 동정의 대상으로만 보지도, 불안의 대상으로만 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그들을 한 사람의 삶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문제를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제도와 미디어,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함께 만들어진 구조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사건을 소비하는 사회에서 구조를 읽는 시민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폭력을 계속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이런 뜻일 것이다. 보이지 않게 된 사람을 다시 보이게 하고, 지워진 이름을 기억하며,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가려진 폭력을 질문하는 것. 그 바라봄은 폭력을 멈추는 완성된 해결책은 아니지만, 적어도 폭력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책임의 시작이다.
참고문헌
- 望月優大, 「アジアとアメリカのあいだ 第14回 暴力を見続けるもの」, 『世界』 2026년 3월호.
- 서울독립영화제, 「안녕, 미누」 작품 소개.
- 한겨레, 「죽은 미누가 여전히 외친다 ‘스탑 크랙다운’」, 2019.10.19.
- 국가인권위원회, 「그래도 사람을 일터에 강제로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글쓴이
조선모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일본 사회와 문화 및 문화간의 갈등 양상과 해소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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