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들어가며: 매대에서 사라진 쌀, 그리고 도매상에서 떼온 ‘공장제 앙금’
2024년 일본 열도를 강타한 이른바 ‘레이와 쌀 파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서늘한 경고를 던졌다. 돈을 가지고도 마트에서 주식인 쌀을 마음대로 살 수 없었던 이 사태는 처음에는 단순한 물가 문제처럼 보였다. 소비자 입장에서 쌀값이 오르고 매대가 비어 있다는 사실은 곧 생활비 부담의 증가이자 일상의 불안으로 다가온다. 나 역시 처음 이 문제를 접했을 때는 “왜 쌀이 부족해졌을까”, “정부가 가격을 안정시키면 해결되지 않을까”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야마다 마사루의 「迷走する『主食』の未来」를 읽으며, 이 사건의 본질은 가격이 아니라 쌀을 계속 생산할 수 있는 농촌사회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사에 등장하는 지바현 산무시의 75세 농민 A씨는 이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아버지 세대부터 이어져 온 골짜기 논을 경작해 왔지만, 건강 악화와 낮은 수익성, 농기계 비용, 후계자 부재로 인해 결국 쌀농사를 포기했다. 다행히 그의 논은 같은 마을의 다른 농가가 임대해 경작하고 있지만, 그 농가 역시 고령자다. 즉 문제는 한 농민의 은퇴가 아니라, 그 뒤를 이어 논을 맡을 사람이 지역사회 안에 더 이상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구나 행정 지도상으로는 정상 농지로 분류된 논들이 실제 현장에서는 잡초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는 기사의 묘사는, 국가의 통계와 농촌의 현실 사이에 놓인 깊은 간극을 드러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 영화는 도라야키 가게를 배경으로, 먹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안에 어떤 노동과 시간이 담기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특히 도매상에서 사 온 공장제 앙금을 쓰는 센타로와, 팥의 목소리를 들으며 직접 앙금을 쑤는 도쿠에 할머니의 대비는 농업과 먹거리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상징한다. 하나는 싸고 빠르고 균일한 결과만을 중시하는 효율성의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기다림, 손의 감각을 존중하는 재생산의 논리다.
본 에세이는 일본의 ‘레이와 쌀 소동’이 보여준 농촌 재생산의 위기를 영화 『앙』의 팥과 앙금의 메타포를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쌀값 폭등을 단순한 소비자 가격 문제가 아니라, 농민의 노동과 농촌 공동체가 보이지 않게 사라져 온 결과로 읽어낼 것이다.
2. 효율성의 폭력: 텅 빈 노동이 만들어낸 도라야키
영화의 주인공 센타로는 작은 도라야키 가게를 운영하지만, 자신이 파는 음식에 특별한 애정이나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는 대형 플라스틱 통에 담긴 공장제 앙금을 도매상에서 가져와 빵 사이에 바르고, 정해진 방식대로 도라야키를 팔 뿐이다. 이 과정은 빠르고 간편하며 비용 면에서도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 앙금 안에는 팥이 자라난 밭의 시간도, 그것을 삶고 저어낸 사람의 손길도, 자연과 인간이 맺은 관계도 보이지 않는다.
센타로의 노동은 현대 소비사회가 먹거리를 대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우리는 편의점 도시락이나 즉석밥을 먹으면서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쌀을 심고 거두었는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가격이 적당하고 맛이 일정하며 쉽게 구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나 역시 평소 즉석밥을 먹을 때 그것을 ‘농민의 노동이 담긴 쌀’이라기보다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바로 완성되는 상품으로만 받아들였다. 밥상 위의 쌀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반복된 노동과 지역 공동체의 유지 속에서 생산된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무감각은 야마다의 기사에서 비판하는 일본 농정의 방향과도 연결된다.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효율적인 대규모 농가 육성과 스마트농업, 수출 경쟁력 강화를 농업의 미래처럼 제시해 왔다. 물론 대규모화와 기술 혁신은 일부 지역과 농가에는 필요한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산무시의 골짜기 논처럼 작고 볕이 잘 들지 않으며 기계화가 어려운 농지에서는 이러한 모델이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 문제는 효율성의 기준으로만 농업을 평가할 때,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소규모 농가와 고령 농민이 자연스럽게 ‘사라져도 되는 존재’처럼 취급된다는 점이다.
센타로가 공장제 앙금을 아무 감정 없이 사용하는 모습은 바로 이 효율성의 폭력을 보여준다. 먹거리의 결과물만 남고 과정은 지워진다. 가격과 공급량은 보이지만, 그 뒤의 손과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쌀 역시 마찬가지다. 소비자는 마트 매대의 가격표를 보지만, 그 쌀이 생산되기까지 논을 관리하고 물길을 조절하며 기후를 견딘 농민의 노동은 쉽게 보지 못한다. 영화 속 공장제 앙금은 현대사회가 먹거리를 자연과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규격화된 상품으로만 소비하게 된 현실의 상징이다.
3. 팥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 농업 재생산의 숨겨진 본질

센타로의 가게에 찾아온 도쿠에 할머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앙금을 만든다. 그녀는 팥을 단순한 식재료로 다루지 않는다. 팥을 물에 불리고, 천천히 삶고, 설탕이 스며들 때까지 기다리며, 팥이 여기까지 온 시간을 상상한다. 영화에서 도쿠에가 팥에게 말을 걸고 “애썼다”는 듯이 대하는 장면은 단순히 감상적인 연출이 아니다. 그것은 먹거리를 하나의 생명 과정으로 바라보는 태도이며,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의 회복을 보여준다.
도쿠에의 앙금 만들기는 비효율적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도 많이 간다. 그러나 바로 그 비효율적인 시간이 도라야키의 맛을 바꾼다. 손님들은 이전과 달라진 앙금의 맛을 알아보고 가게를 찾기 시작한다. 영화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줄이고 제거해 온 시간이 사실은 먹거리의 본질을 이루는 시간이 아니었는가.
농업도 이와 같다. 쌀 한 톨이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단순히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기계적 과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볍씨를 준비하고, 모를 내고, 물을 관리하고, 잡초를 뽑고,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수많은 판단과 경험이 필요하다. 특히 작은 논과 산간 지역의 농지는 단순한 생산 단위가 아니라 마을의 기억과 생태적 지식이 축적된 장소다. 야마다의 기사에서 A씨가 생협 조합원들과 논에서 교류 행사를 열고, 농약을 줄이며, 직파 재배를 시도했던 사례는 농업이 단순한 경제활동을 넘어 지역사회와 자연을 연결하는 장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도쿠에 할머니의 굽은 손은 깊은 상징성을 갖는다. 한센병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던 그녀의 몸은 오랫동안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앙금은 바로 그 손에서 만들어졌다. 사회가 쓸모없다고 밀어낸 존재가 사실은 가장 깊은 맛과 지혜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고령 농민의 현실과도 겹친다. 도시 사회는 나이 든 농민을 생산성이 낮고 비효율적인 존재로 바라보기 쉽다. 하지만 그들이 평생 몸으로 익힌 흙의 감각, 날씨를 읽는 지혜, 마을 공동체를 유지해 온 경험은 단기간에 대체될 수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따라서 농촌 재생산이란 단순히 농산물 생산량을 유지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감각과 지식,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포함하는 문제다. 도쿠에가 팥의 목소리를 듣는 장면은 농업이 본래 가지고 있던 관계적 성격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다.
4. 도쿠에 할머니가 떠난 자리: 단절된 전수와 붕괴하는 기반
도쿠에의 수제 앙금 덕분에 도라야키 가게는 활기를 되찾지만, 그녀가 한센병 환자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님들은 발길을 끊는다. 결국 도쿠에는 가게를 떠난다. 이 장면은 사회가 오랫동안 배제해 온 존재의 노동을 잠시 소비하다가,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도쿠에가 만든 맛은 원했지만, 도쿠에라는 사람의 삶과 상처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도쿠에가 떠난 뒤 센타로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그는 할머니가 남겨준 방식대로 앙금을 만들어보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레시피를 따라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불 조절, 기다림, 팥을 대하는 마음, 손끝의 감각은 오랜 시간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다. 도쿠에의 부재는 단순히 한 노동자의 부재가 아니라, 전수되지 못한 지식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장면은 농촌의 후계자 문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야마다의 기사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앞으로 누가 논을 지을 것인가”이다. 일본 농민의 평균 연령은 68세에 이르고, 농업 경영체 수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소규모 농가가 떠난 자리를 대규모 농가가 모두 대신할 수 있다면 문제는 단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사에서 지적하듯 일본 쌀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5헥타르 미만의 소규모 농가가 생산한다. 특히 기계화가 어렵고 생산성이 낮은 작은 논은 대규모 농가가 흡수하기 어렵다. 결국 고령 농민이 떠난 뒤 그 땅은 경작지가 아니라 휴경지와 덤불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더 무서운 것은 농업 기반이 한 번 무너지면 돈을 투입한다고 곧바로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농업은 공장처럼 멈췄다가 필요할 때 다시 켤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농지를 관리하는 사람, 농기계와 수로, 마을 안의 협력 관계, 지역의 기후와 토양을 아는 지식이 함께 유지되어야 한다. 도쿠에가 떠난 뒤 센타로가 맛을 재현하지 못하듯, 고령 농민이 사라진 뒤 농촌의 생산 기반 역시 쉽게 복원되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센타로가 숲속에서 “도라야키 사세요”라고 외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공장제 앙금을 기계적으로 파는 사람이 아니다. 도쿠에에게서 배운 감각을 완벽히 재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먹거리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변화했다. 이는 농촌 문제를 바라보는 도시 청년 세대와 정책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필요한 것은 단순히 농업을 낡은 산업으로 보고 첨단 기술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지켜 온 가치와 지식을 어떻게 이어받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한국 사회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은 일본처럼 최근 쌀 부족 사태가 전면화된 것은 아니지만, 농가 고령화와 농지 세분화, 후계 농업인 부족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지금은 쌀이 남는 것처럼 보여도, 농촌을 지탱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미래의 식량 안정성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일본의 쌀 소동은 한국에도 “우리는 쌀을 얼마나 싸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앞으로 누가 쌀을 지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5. 나가기: ‘가격을 묻는 사회’에서 ‘손을 묻는 사회’로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단팥빵이라는 소박한 소재를 통해, 효율성과 가격만으로 먹거리를 바라보는 사회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준다. 센타로의 공장제 앙금은 빠르고 싸며 편리하지만, 그 안에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손이 빠져 있다. 반대로 도쿠에의 앙금은 느리고 번거롭지만, 팥이 지나온 시간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정성이 담겨 있다. 이 대비는 일본의 ‘레이와 쌀 소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유가 된다.
쌀값 폭등은 단순히 쌀이 비싸졌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농민의 노동을 오랫동안 낮게 평가하고, 소규모 농가의 이탈을 방치하고, 농촌 공동체의 붕괴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해 온 결과가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마트의 빈 쌀 매대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위기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농촌 내부에서 진행되어 온 재생산 기반의 붕괴가 도시의 식탁에 도착한 장면이다.
우리는 먹거리를 수급 곡선과 가격표 위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쌀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식량안보, 지역 공동체, 농촌 경관, 생태계 보전과 연결된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다. 야마다의 기사가 유럽의 농업 정책을 언급하며 환경 보전과 중소농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농업의 가치는 생산량과 가격 경쟁력만으로 환산될 수 없다. 농민이 논을 지키는 일은 단지 쌀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자연환경을 함께 유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쌀값이 얼마인가”를 묻는 태도에서 “이 쌀을 누가 어떤 손으로 길러냈는가”를 묻는 태도로의 전환이다. 도쿠에 할머니가 팥의 목소리를 들었듯이, 우리 역시 식탁 위의 쌀이 들려주는 농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목소리는 고령 농민의 굽은 손, 방치되어 가는 작은 논, 후계자를 찾지 못한 마을, 그리고 언젠가 우리 식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주식의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도쿠에가 남긴 “우리는 이 세상을 보고, 듣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은 단지 개인의 삶에 대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농촌의 현실을 보고, 듣지 않으려 했던 농민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팥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식탁은 결국 쌀의 목소리도 잃게 된다. 농촌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재생산하는 일은 단순한 농업 정책이 아니라, 우리의 식탁과 공동체, 그리고 인간성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과제다.
참고문헌
야마다 마사루. (2026). 「迷走する『主食』の未来: コメ高騰の陰で進む農家の脱落」. 『世界』, 2026년 3월호, 189-196.
가와세 나오미 감독. (2015). 『앙: 단팥 인생 이야기』.
글쓴이 | 서동진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3학년 재학 중이다. 한국과 일본의 지방 농업 관련 문제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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