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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논평

불안은 왜 과거의 영웅을 호출하는가

by uwt0411 2026. 6. 23.

시바 료타로- 일본의 소설가, 논픽션작가, 평론가

 

1. 들어가며 : 미래의 불안은 왜 과거의 자존심을 부르는가

 

2026년 현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은 다름 아닌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일 것이다. 인공지능(AI)의 기술이 촉발한 산업 구조의 재편과 저성장의 고착화,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대중은 미래의 좌표를 상실했다. 이처럼 실존적 위기가 극에 달할 때, 미디어가 대중의 불안을 다루는 방식은 특징적인 방향성을 띤다. 복잡한 다자간의 이해관계를 풀고 구조적인 해법을 모색하기보다는,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안전한 과거의 영웅 서사를 통해 심리적인 위안을 제공하곤 한다. , 위기의 시대속 미디어는 문제의 해결책으로 종종 국제적 협력이나 구조적 쇄신보다는 "우리 안에 있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자국 중심적 서사를 제시한다. 최근 일본 보수매체 <문예춘추>가 시바 료타로라는 인물을 다시 호명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본 에세이는 이러한 호출 현상을 추적하여 미디어가 불안을 어떻게 자국주의적 감정으로 조직하는지 분석하고, 나아가 한국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우리 안의 우상화 현상을 성찰하고자 한다.

 

2. 문예춘추의 시바 료타로 호출 : 기능적 실패로의 교묘한 치환

 

<문예춘추>에 실린 이소다 미치후미의 글은 현재를 AI 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전환기로 규정하며, 이에 대한 대응을 그르치면 패전에 필적하는 불행이 초래될 것이라 경고한다. 이소다는 그 위기의 해법으로 시바 료타로가 주창한 일본 고유의 리얼리즘회복을 내세운다. 시바 료타로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를 비정상적인 '이태(異胎)의 시대'로 명명하고, 이 시기 일본이 합리적인 리얼리즘을 잃고 폭주했기에 파멸에 이르렀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바 료타로의 호명은 표면적으로는 과거의 과오를 성찰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국가적 자존심의 복원으로 수렴하는 한계를 지닌다. 시바 료타로의 이분법적 역사관은 맹목적으로 폭주한 '쇼와 시대'와 건강하게 근대화를 이룩한 '메이지 시대'를 분리함으로써 전후 일본인에게 심리적 면죄부를 제공해왔다. 이 과정에서 이웃 나라인 조선의 주권을 짓밟은 제국주의적 폭력은 철저히 소거된다. 결국 이 담론은 "우리가 타국에 어떠한 폭력을 가했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우리는 어쩌다 합리성을 상실하고 실패했는가"라는 기능적인 아쉬움으로 교묘하게 치환하여 동아시아적 책임의식을 외면하게 만든다.

 

3. 한일 자국주의 콘텐츠의 비대칭적 감정 동원과 그 심리적 배경

 

특정 영웅 서사와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현재의 불안을 달래려는 태도는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일 양국의 미디어 콘텐츠는 역사적 출발점은 다르나, 불안을 해소하는 메커니즘에 있어서 명확한 공통점을 지닌다. 일본의 보수 담론이 상실된 엘리트주의적 자존심을 복원하려 한다면, 한국의 콘텐츠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는 더 이상 아래가 아니다"라는 대중적 자기 증명에 집중한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양국의 대표적인 텍스트가 바로 한국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일본의 『영원의 제로(永遠の0)』다.

 

김진명 - 새움 출판사, 20.07.10

 

한국 사회에서 대중적 자기 증명의 욕구가 가장 강렬하게 표현된 텍스트는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이고 구체적인 장면은, 남북한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공동 개발한 뒤 일본의 무력 도발에 맞서 일본 근해의 무인도를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하여 무력을 투사하는 클라이맥스다.

이러한 노골적인 군사적 판타지가 출간 당시부터 IMF 외환위기 전후까지 한국 사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대중이 느끼던 지정학적 콤플렉스와 경제적 불안감을 '자주국방' '단죄'라는 명쾌한 서사로 상쇄해주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주권과 미래가 외세나 국제 자본에 의해 흔들릴 수 있다는 깊은 불안감은, 복잡다단한 국제 정치의 역학을 무시한 채 민족주의적 천재(이휘소 박사)와 지도자의 결단이라는 단편적 영웅 서사로 대체되었다. 대중은 껄끄러운 현실의 한계를 직시하는 대신, 타국(일본)을 압도하는 무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현실의 무력감을 보상받았다.

 

영화 「영원의 제로(永遠の0)」 포스터 (출처: 씨네21)

 

반면, 일본에서 극단적인 자국주의와 감정의 정치를 보여준 텍스트는 햐쿠타 나오키의 영원의 제로다. 이 작품은 현대의 무기력한 청년이 태평양 전쟁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로 전사한 조부의 흔적을 추적하는 서사를 갖고 있다. 소설은 조부를 맹목적인 천황 숭배자가 아니라 가족에게 살아서 돌아가고 싶어 했던 합리적이고 뛰어난 조종사로 그려낸다.

이 작품이 일본 대중, 특히 젊은 세대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는 명확한다. 장기 불황과 국가적 침체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던 세대에게, 조상들의 전쟁을 전범 국가의 광기가 아닌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한 순수하고 숭고한 희생으로 재포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사가 작동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지워지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들이 벌인 침략 전쟁으로 인해 죽어간 수많은 아시아 희생자들과, 자국 청년들의 자살 공격으로 내몬 제국주의 국가 시스템의 구조적 폭력이다. 가해자의 역사는 가족애라는 보편적인 감정 뒤로 완벽하게 은폐된다.

 

결과적으로 이 두 텍스트는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역사의 복합성을 단순화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한쪽은 과거의 역사적 상흔을 압도적인 무력과 도덕적 우월성을 통해 보상받으려 하고, 다른 한쪽은 구조적인 가해의 맥락을 소거한 채 개인의 숭고함만을 부각하여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려 한다. 이처럼 위기 극복이라는 명분 아래 역사를 감정적으로 소비하고 우상화하는 태도는, 다층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동아시아에서 이성적이고 성숙한 국제적 감각을 기르는 데 뚜렷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4. 쇼츠(Shorts) 시대의 감정 동원과 파편화된 사유

 

더욱 심각한 것은 2026년 현재의 숏폼 중심 디지털 생태계가 이러한 역사적 우상화와 자국 중심주의를 극단적으로 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짧고 자극적인 플랫폼의 구조는 복잡한 국제 정세와 다자간 협력의 언어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알고리즘은 이목을 끌기 위해 극도로 이분법적인 자국 찬양과 타국 배척의 서사만을 선택적으로 유통시킨다

플랫폼 기업들은 미래에 대한 대중의 불안을 단편적인 국가주의적 쾌감으로 조직하여 철저하게 수익화한다. 대중은 미디어가 조각내어 제공하는 편향된 영웅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소비하며, 맹목적인 배타성에 길들여진다. 결국 불안에 쫓겨 과거의 영광을 호명하는 사회적 관성이 알고리즘의 비즈니스 모델과 결합하면서, 대중이 현재의 복합적인 위기를 구조적으로 사유할 이성적 능력은 급격히 마비되고 있다.

 

5. 마무리하며 : 자존심보다 어려운 것,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

 

위기의 시대 속 미디어가 제시하는 우리 안의 정신회복이나 자국 중심의 정서적 위안은 일시적인 진통제일 뿐,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일본이 근대화 과정의 기능적 성취만을 부각하고, 한국이 역사적 상처에 대한 보상 심리로 타자를 배제하는 서사에만 의존한다면 동아시아의 다자간 협력과 공존은 언제나 요원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의 국가적 자존심은 결점 없는 영웅 서사라는 과거로 도피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AI 혁명과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대중의 불안을 수익화하는 2026년 현재,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단편적인 환상을 거부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현실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태도이다.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진실 그리고 국제 사회의 이해관계를 직시하는 냉철함만이, 불확실한 미래를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나침반이 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참고문헌

이소다 미치후미. 「AI 시대에 읽어야 할 시바 료타로」문예춘추. 2026.

김진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새움. 2020.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 <영원의 제로> (햐쿠타 나오키 원작). TOHO.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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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상우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AI가 촉발한 거대한 기술적·사회적 전환기를 마주하며 급변하는 미디어 생태계와 시대의 흐름에 다각도로 적응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