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들어가며: 세계주의자의 이면에서 발견한 동원의 징후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평화주의자이자 우리에게 민족자결주의로 익숙한 제28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이상주의적 평화주의자의 전형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그가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 창설 주도는 인류가 마침내 제국주의의 야만을 벗어나 평화의 질서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낙관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최근 학술 잡지 《세카이(世界)》 2026년 3월호에 게재된 문화사학자 아베 고다의 비평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기억하는 도덕적 명분의 단단한 외피 밑에 숨겨진 철저히 배타적이고 자의적인 정치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었다. 실제 역사 속 윌슨의 행보는 그가 내걸었던 인류 보편의 도덕률과 정반대의 궤적을 그렸다. 그는 겉으로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의 이식을 부르짖었지만 뒤에서는 멕시코 베라크루스 강제 점령(1914)과 아이티 무력 침공 및 군사 통치(1915)를 주도하며 라틴아메리카 주권국가들의 자결권을 폭력을 동원해 빼앗았다. 심지어 국내적으로는 연방 정부 기관 내에 철저한 인종 분리(Segregation) 정책을 재도입하여 흑인 공무원들을 격리하고 차별을 제도화하는 데 앞장섰다. 약소국의 주권을 유린하고 자국 내 소수자의 인권을 외면한 지도자가 어떻게 대외적으로는 숭고한 '세계주의자'로 칭송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보편성을 가장한 도덕적 명분이 실제로는 철저히 자국의 패권을 정당화하고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자의적 선 긋기’의 도구로 운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윌슨의 이중성은 한 세기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 시대 정치 지형에 기묘한 기시감을 던진다. 윌슨이 주창했던 거창하고 도덕적인 세계주의 명분이 사라진 오늘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도널드 트럼프로 대변되는 노골적인 ‘자국 중심주의’와 포퓰리즘이다. 명분의 수사학은 도덕적 이상주의에서 이기적 현실주의로 정반대 방향 가리키고 있지만 대중 내재된 불안 자극해 지지층 동원하는 내밀한 구조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두 시대 정치 모두 복잡한 구조적 문제 직시하기보다 세상 ‘선량한 우리’와 ‘위험한 그들’로 이분화하는 손쉬운 갈라치기에서 동력원 얻기 때문이다.
이런 기시감이 무엇인지 밝히고 정치적 동원의 문법 해부하기 위해 정치학자 얀 베르너 뮐러 저서 『누가 포퓰리스트인가(What is Populism?)』를 펼쳤다. 뮐러는 포퓰리즘을 단순히 대중 인기 영합하는 무책임 대중선동이나 정책적 포퓰리즘으로 치부하는 통념을 거부한다. 그가 제시하는 포퓰리즘의 핵심 징후는 “오직 자신들만 진정으로 국민을 대표한다”는 도덕적 독점과 반(反)다원주의다. 이 글은 뮐러가 제시 분석 틀 빌려, 윌슨 세련된 위선에서부터 트럼프 노골적인 배타성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동원의 본질을 추적한다.
2. 명분의 변주와 동원의 문법: 윌슨의 도덕주의에서 트럼프의 배타성까지
얀 베르너 뮐러가 명시하듯, 포퓰리스트들은 대중의 사회·경제적 불안을 치밀하게 자극하여 복잡하고 흑백의 경계가 불분명한 현실을 선명한 선악의 구도로 환원한다. 이들은 '순수하고 흠결 없는 우리(진짜 국민)'와 '부패하고 위협적인 그들(엘리트 혹은 외부자)'이라는 가상의 대립각을 세우며 정치적 동력을 얻는다. 이러한 뮐러의 렌즈로 과거를 복기해 보면, 110여 년 전 우드로 윌슨이 내세운 '평화'와 '민주주의' 역시 보편적인 가치의 실현이라기보다는 타자를 배제하고 내부를 결속하기 위한 치밀한 정치적 동원의 도구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윌슨의 정치는 세상을 '문명화된 민주 국가(우리)'와 '비문명화된 전제 국가(그들)'로 철저히 양분했다. 그는 이러한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대중이 느끼는 전쟁의 공포와 불안을 통제했다. 윌슨의 동원 문법이 가진 무서운 점은 국가의 강제력을 국민의 '자발적 헌신'으로 정교하게 포장하는 수사학에 있었다. 그는 의회에 보낸 「군 징집에 관한 메시지」(1917)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이는 결코 원치 않는 자들을 억지로 징집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 함께 자원한 국민 가운데서 선발을 진행하는 과정일 뿐이다.”
후대 연구자들이 ‘강제적 자원주의(coercive voluntarism)’라 명명한 이 기묘한 논리는, 국가가 부과한 군사적 의무를 거부하거나 반전(反戰)을 외치는 이들을 신념 있는 저항자가 아닌, 사회적 낙오자이자 게으름뱅이인 ‘슬래커(Slacker)’로 낙인찍어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 세계를 무대로 싸워야 한다는 확장된 세계주의(Worldism) 논리는, 결국 미국이 독단적으로 규정한 ‘비민주적 타국가’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우리'라는 도덕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 타자의 존재와 고통은 평화라는 거대한 명분 아래 쉽게 은폐되고 지워졌다.
시간이 흘러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부작용과 산업 구조 재편 속에서 대중의 경제적 박탈감이 극에 달하자, 미국 정치 지형에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했다. 트럼프는 윌슨이 활용했던 보편적 인권이나 민주주의 수호 같은 세련된 도덕적 수사를 가차 없이 폐기했다. 대신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직관적 슬로건과 함께, 국경 장벽 건설 및 자국 산업 보호라는 이기적이고 적나라한 현실주의적이고 자국중심주의적인 목표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겉보기에 정반대 지점을 가리키는 듯한 두 지도자의 동원 문법은 그 내밀한 뼈대에서 일치점을 보인다. 트럼프는 2016년 공화당 전당대회 수락 연설에서 “내가 곧 여러분의 목소리다(I am your voice)”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뮐러가 지적한 포퓰리즘의 핵심인 ‘도덕적 대표권의 독점’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윌슨이 반대파를 ‘평화를 방해하는 스파이’로 몰아세웠다면, 트럼프는 기성 정치인과 언론을 ‘워싱턴의 부패한 오물(The Swamp)’이자 ‘국민의 적’으로 규정했다. 또한, 미국 노동자의 삶이 팍팍해진 원인을 거대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기보다, 국경을 넘어오는 ‘불법 이민자’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외부 세계’라는 명확한 표적에 투사했다.
결국 윌슨의 도덕주의적 세계주의와 트럼프의 배타적 자국 중심주의는 '명분의 외피'만 변주되었을 뿐, 복잡한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분노할 대상(그들)을 명확히 지정하여 우리의 결속을 다지는 이분법적 기획'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치적 문법을 공유하고 있다.
3. 한국 사회에 투영된 이분법: 불안을 먹고 자라는 혐오의 정치
얀 베르너 뮐러가 그의 저서에서 던지는 경고음은 결코 서구 선진국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가장 최전선에서 위협하는 치명적인 적이 결코 체제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정당한 언어와 선거라는 제도적 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내부를 찢어발기는 포퓰리즘 그 자체에 있다고 단언했다. 우리는 이러한 시선을 오늘날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로 가져와 비판적으로 현 상황에 대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이른바 계층 이동을 가능케 하던 사다리가 완전히 부서지고, 고용과 주거를 둘러싼 미래의 불확실성이 극에 달한 상태다. 이처럼 대중의 구조적 불안과 삶의 박탈감이 임계점에 달했을 때, 한국의 정치권과 기성 미디어는 이 얽히고설킨 모순의 타래를 인내심 있게 풀어내기보다는, 대중의 말초적 분노를 자극하는 가장 손쉽고 즉각적인 갈라치기 문법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 그들은 겉으로는 항상 '공정', '법치', 혹은 '국익'과 같이 누구도 쉽게 거부할 수 없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명분을 방패막이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러한 수사들이 실제 현실 정치의 표면에서 소비되고 작동하는 방식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도출하고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특정 집단을 '공동체의 이익을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그들)'로 타자화하여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포퓰리즘적 도구로 전락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갈라치기가 가장 첨예하게 작동하는 지점이 바로 청년 세대의 불안을 자극하는 젠더 및 세대 갈등의 정치화 양상이다. 오늘날 청년들이 맞닥뜨린 취업난과 주거 불안정의 본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극심한 격차, 양질의 일자리 감소 같은 거시적인 산업 구조의 왜곡에 있다. 그러나 정치는 이를 해결하려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에 집중하는 대신, "여성가족부 폐지"나 "할당제로 인한 남성 역차별" 같은 자극적인 슬로건을 던지며 갈등의 원인을 특정 성별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을 취한다. 반대로 기성세대의 독점과 이기주의만을 청년 박탈감의 유일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세대 간 전면전 양상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은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기보다 서로를 향한 피해의식을 키우게 되며, 결국 합리적이고 다각적인 사회적 불평등의 해법에 대한 토론의 장은 완전히 실종된 채 "누가 진짜 더 불행하고 억울한가"를 겨루는 기괴한 피해자성(Victimhood)의 경쟁만이 남게 된다.
노동 시장을 둘러싼 갈등을 다루는 방식 역시 뮐러가 지적한 '반다원주의적 배타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으로 쪼개진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를 개혁하려는 복잡한 정책적 노력은 외면된다. 그 대신,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특정 노동단체를 향해 "법치를 유린하는 기득권 카르텔"이라거나 "국가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는 자극적인 낙인을 찍고, 이를 여과 없이 확성기처럼 받아쓰는 언론 보도가 판을 친다. 이러한 수사는 윌슨이 반전 주의자들을 '스파이'로 몰아세우고, 트럼프가 이민자들을 '미국의 일자리를 뺏는 적'으로 규정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로 인해 불평등한 노동 구조 속에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할 주체들은 한순간에 공동체의 안녕과 경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그들’로 격하되고 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갈라치기와 분열의 정치가 확증 편향을 유도하는 알고리즘 기반의 디지털 미디어 환경과 결합하면서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극단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대중은 유튜브나 SNS 채널 속에서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정보만을 취사선택하며 에코체임버(Echo Chamber) 효과를 심화시킨다. 이 안에서 나와 다른 의견이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존해야 할 파트너가 아니라, 반드시 궤멸시켜야 할 도덕적 악(惡)이자 타도 대상으로 여겨진다. 결국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거대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민적 연대와 공감대'는 처참하게 해체되고 있으며, 오직 파편화된 진영 논리와 정체성에 기반한 혐오의 정치만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하고도 위험한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실정이다.
4. 나가기: 다원주의의 복원과 비판적 이성을 향하여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를 읽으며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정치적 명분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세상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데에 기여한다면 결국 대중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동원의 기계일 뿐이다. 110여 년 전 윌슨이 보여준 세련된 위선과 오늘날 트럼프가 구사하는 노골적인 배타성, 그리고 현재 한국 사회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는 내부의 갈등은 모두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려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뮐러는 이러한 포퓰리즘의 문법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해독제로 사회가 필연적으로 이질적이고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다원주의(Pluralism)'를 강조한다. 단일하고 순수한 '진짜 국민의 뜻'이라는 것은 애초에 가상에 불과하며, 민주주의란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타자들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타협하는 껄끄러운 과정을 감내하는 제도라는 뜻이다. 누군가 '우리'의 정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그들'을 배제하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이 복잡한 현실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정치적 속임수는 아닌지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한다. 아베 고다가 비평의 끝에 우리에게 던진 메세지처럼, 당장 우리를 설득하려는 화려한 이야기가 “결국 무자비한 폭력을 긍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호히 부정하고 있는가”를 판단의 절대적인 잣대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가 위기에 처하고 내일이 불안할수록, 누군가를 적으로 돌리는 분열의 길은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알고리즘이 혐오를 부추기고 정치적 양극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일수록, 맹목적인 동원을 거부하고 현실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비판적 이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렇다면 분열과 혐오의 언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나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그 실천의 첫걸음은 내 안의 이분법적 수사학을 경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타인을 나와 다른 존재로 인정하고, 나와 다른 목소리를 파괴해야 할 ‘적’이 아닌 공동체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다원주의적 감각을 일상에서 훈련해야 한다. 텍스트의 행간을 읽어내듯 사회적 현상의 이면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단 하나의 거대한 명분 뒤에 숨겨진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나와 다른 타자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는 이 치열한 사유야말로, 무한히 반복되는 이분법의 정치와 서로에 대한 혐오를 멈추고 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가장 단단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참고자료
아베 고다(阿部幸大). 「우드로 윌슨과 제1차 세계대전」. 『世界』 2026.03.
얀 베르너 뮐러(Jan-Werner Müller).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노시내 옮김. 도서출판마티, 2017.
글쓴이 강현서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3학년 재학 중이며,
일본의 사회,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문학과 영상 매체를 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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