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 논평

검은 정장의 대열 속에서 길들여진 청춘

by mynote53158 2026. 6. 23.

https://contents.kyobobook.co.kr/sih/fit-in/458x0/pdt/9791138479325.jpg
동아시아미디어론_최종에세이_송지연.docx
0.01MB

 

 

검은 정장의 대열 속에서 길들여진 청춘
— 이케다 기요히코의 『자숙을 강요하는 일본』을 읽고

 

2023110241 송지연


Ⅰ. 들어가기: 국경을 넘어 일상으로 침투한 구조적 폭력

봄이 되면 일본의 거리와 지하철은 검은색으로 물든다. 검은 정장, 흰 셔츠, 검은 가방을 든 취업준비생들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일본 취업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번 동아시아미디어론 발표를 준비하면서 다카하시 준코의 「리크루트 수트」(『세카이(世界)』 2026.3)를 번역하고 읽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이것이 일본 특유의 독특한 취업 관행을 다룬 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글을 읽을수록 이 문제는 복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사에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문장은 "모두가 싫어하지만 아무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대목이었다. 자유의지로 입는 정장이 아니라, 입지 않으면 불안한 정장. 그 역설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기사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떠오른 책이 이케다 기요히코(池田清彦)의 『자숙을 강요하는 일본』(김준 옮김, 소미미디어, 2023)이었다. 생물학자이자 사회평론가인 저자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일본 사회 전반에 확산된 동조 압력의 구조를 해부하며, 개인이 어떻게 스스로를 집단의 기준에 맞추어 길들여가는지를 예리하게 추적한다. 본 에세이는 이 책을 중심으로 리크루트 수트 문화의 심층을 분석하고, 나아가 이 현상이 한국 사회에도 형태를 바꾸어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동조 압력과 자기 가축화의 메커니즘

『자숙을 강요하는 일본』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동조 압력(同調圧力)'과 그것이 낳는 '자기 가축화(自己家畜化)'다. 이케다는 코로나19 시기 등장한 '자숙 경찰', 즉 타인의 방역 수칙 위반을 사적으로 감시하고 비난하던 현상을 분석하면서 이렇게 쓴다. "일본인은 다른 사람과 다른 행동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집단 전체를 하나의 방향으로 몰아붙이며, 이탈자를 색출하고 제거하는 상호 감시 체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낸다." 자숙 경찰은 특별한 악인이 아니다. 동조 압력이라는 구조가 평범한 개인을 감시자로 만든 것이다.

더 섬뜩한 것은 이 압력이 외부에서 강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규범을 따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된다. 이케다가 '자기 가축화'라고 이름 붙인 이 과정은,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조금씩 반납하며 집단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적응 방식이다. 여기서 이케다가 '가축'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가축은 야생의 본능을 스스로 억누르고 주인이 정한 울타리 안에서만 움직이도록 길들여진 존재다. 그 길들임의 주체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을 때, 즉 스스로 야성을 포기할 때 자기 가축화가 완성된다.

이 개념은 읽는 내내 불편하게 나를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지난 학기 캡스톤 디자인 수업에서 조별 프로젝트 주제를 정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한국 핫플레이스 SNS 계정을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요즘 트렌드에 맞는 카페, 애니메이션 전시회, 감성 공간들을 직접 방문해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조원들은 영상 제작에 시간이 너무 든다며 반대했고, 결국 일본어 문법을 알려주는 정형화된 계정 운영안이 채택되었다. 흥미롭게도 그 프로젝트는 대상을 받았다. 결과만 보면 조원들의 판단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내 의견이 틀렸다는 것보다 아예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오래 마음에 걸렸다. 새로운 것을 제안하는 것 자체가 이미 리스크로 여겨지는 분위기. 이케다가 말하는 자기 가축화는 나에게도 그렇게 스며들어 있었다.


Ⅲ. 리크루트 수트: 복종의 의례이자 가축화의 증명서

자기 가축화의 논리로 보면, 왜 청년들이 원하지 않으면서도 검은 정장을 입는지가 분명해진다. 「리크루트 수트」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취업 복장은 지금처럼 획일적이지 않았다. 저자 다카하시 역시 자신이 취업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베이지색 정장에 두꺼운 어깨 패드를 달고 면접장을 다녔다고 회상한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안정성과 무난함이 최우선 가치가 되면서, 복장도 점점 '안전한 선택'으로 수렴되었다. 기사 속 한 여학생이 "자신이 좋아하는 색의 셔츠조차 입지 못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리크루트 수트가 취향의 문제가 아님이 드러난다.

이 통제는 복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의 취업 학원과 면접 지침서들은 올바른 면접용 미소의 각도, 인사의 정확한 각도(15도·30도·45도), 그리고 질문 유형별로 암기해야 할 답변 템플릿까지 규정한다. "당신의 강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자신의 날것의 언어로 답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한 행위로 여겨진다. 매뉴얼을 벗어난 솔직한 답변은 '준비가 안 된 지원자'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취업준비생을 둘러싼 이 규범화의 압력은 복장 지침 하나에서 시작해, 언어와 표정과 몸짓 전반을 조형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나 역시 그 감점주의의 논리에 이미 익숙하다. 대학 입시 면접을 준비하던 때, 나는 인터넷을 뒤지고 주변에 물어가며 결국 검은 치마에 흰 블라우스, 단정하게 묶은 머리, 굽이 낮은 검은 구두를 골랐다.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싶었던 게 아니라, 튀는 복장으로 괜히 감점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안전하게, 남들 다 입는 대로. 그때의 논리는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곧 졸업을 앞두고 기업 면접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도, 나는 복장을 튀게 입을 생각이 없다. 더 나아가 나는 최근 영어 말하기 점수가 평균 수준으로 나왔는데, 그 자격증을 서류에 아예 넣지 않았다. 평균이라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는 것이 마이너스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평균으로는 어필이 안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천 명의 청년이 똑같은 검은 정장을 입고 면접장으로 향하는 그 행렬은, 생존을 위해 주체성을 스스로 반납했다는 무언의 선언이다. 리크루트 수트는 패션이 아니라 항복 문서다.


Ⅳ.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리크루트 수트

발표를 준비하며 이 현상을 일본만의 특수한 문화로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한국에는 검은 정장 대열이 없다. 하지만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스펙이라는 보이지 않는 제복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0~34세 미취업 청년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미취업 청년의 취업준비 실태조사」(2024)에 따르면, 취업준비생의 74.6%가 기업의 채용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직무 관련 일경험'을 꼽았다. 인턴, 대외활동, 직무 자격증으로 수렴되는 이 기준은 사실상 새로운 표준 스펙 목록이 되었다. 기업이 '창의성'을 강조하면서도 실제 채용에서는 정해진 틀 안의 경험만을 유효하게 인정하는 구조는, 일본의 리크루트 수트 감점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압력이 청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이상준 외 연구진이 펴낸 『공채의 종말과 노동시장의 변화』(2023)에 따르면, 공채 제도는 포화된 채용시장에서 고스펙 구직자를 양산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으며, 매년 신규 대졸 구직자 수가 40만 명 이상을 기록하는데 기업이 공채를 통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계가 있어 요구 기준을 지속적으로 높여왔다. 이 구조 속에서 구직자들은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기 위해 취업 준비에만 1~2년을 투자하게 되었다. 이케다가 말하는 자기 가축화의 기간이 그만큼 길어진 것이다.

나도 그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취업 사이트에 서류 합격 후기가 올라오면, 나는 그 사람의 스펙과 내 스펙을 자동으로 비교하게 된다. 합격자가 가진 자격증이 내게 없으면 "나도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어학 점수가 970점이라는 글을 보면 토익 900점이 넘는 나도 순간 "더 올려야 하나"라는 불안이 밀려온다. 내 점수가 나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비교는 멈추지 않는다. 누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스펙이 새로운 기준선이 되고, 나는 그 기준 아래 서지 않으려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이것은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청년들이 안전한 선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채용 구조가 이 불안을 구조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이 상황을 가속하는 새로운 변수가 있다. AI를 활용한 자기소개서 작성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AI 서류 평가 서비스 무하유가 분석한 「AI 자기소개서 트렌드 리포트」(2025)에 따르면, 2025년 1분기 제출된 자기소개서의 69%가 AI를 활용해 작성된 것으로, 2023년 하반기 7%에 불과했던 비율이 약 1년 반 만에 9배 이상 급증했다. 같은 도구로 작성된 자기소개서가 채용 시장을 가득 채울 때, 개인의 언어와 경험은 더 빠른 속도로 균질화된다. 어쩌면 다음 세대의 리크루트 수트는 검은 정장도 스펙표도 아닌, AI가 학습한 '합격하는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Ⅴ. 나가기: 길들여진 맹목을 넘어 주체적 개인으로

『자숙을 강요하는 일본』을 덮으면서 이케다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이 구조를 돌파할 힘은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회복'에 있다고 조용히 암시한다.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취업 학원이 알려준 답변 대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 스펙 평균표 앞에서 불안해하기 전에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먼저 묻는 것, 조별 발표에서 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방향이 아닌 내가 믿는 방향을 한 번쯤 끝까지 밀어보는 것. 그 아주 작은 균열들이 자기 가축화의 사슬을 흔든다.

캡스톤 프로젝트에서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채택되지 않았다. 채택된 안이 대상을 받았으니 결과적으로는 맞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 반대의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내 아이디어가 시도됐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 질문 자체가 이케다가 말하는 '생각하는 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결과를 알 수 없더라도 시도를 상상해보는 것, 다수의 선택이 유일한 정답이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해보는 것.

다카하시는 기사 말미에서 사람들이 이제 사고방식에까지 리크루트 수트를 입고 있다고 말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다소 과장처럼 들렸는데, 지금은 그 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리크루트 수트와 규격화된 스펙의 문제는 개인의 유약함이 아니라, 비판과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감시 문화와 통제하기 쉬운 인력만을 선호하는 시스템이 합작한 결과다. 그렇기에 해법도 개인의 용기에만 기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보다, 왜 내가 이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태도다.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개인들의 연대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방식일 것이다.


참고문헌


이케다 기요히코(池田清彦) 저, 김준 역 (2023). 『자숙을 강요하는 일본』. 소미미디어

다카하시 준코 (2026.3). 「リクルートスーツ」. 『世界』. 岩波書店.

한국경영자총협회 (2024). 「미취업 청년의 취업준비 실태조사」. https://eiec.kdi.re.kr/policy/domesticView.do?ac=0000190206
무하유 (2025). 「AI 자기소개서 트렌드 리포트 2025」. 매일일보 2025.6.11. http://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1248238


글쓴이 소개

송지연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4학년 재학 중이며, 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있다. 현재 취업을 준비하며 일본어·경영 두 분야를 넘나드는 시각으로 동아시아 사회와 문화를 바라보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번 에세이는 수업에서 직접 번역하고 발표한 「리크루트 수트」를 출발점으로, 취업을 앞둔 당사자로서 일본과 한국 청년 세대가 공유하는 동조 압력의 구조를 탐색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