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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디어 번역과 해제

친애하는 신체에게: 나의 생존을 ‘활동’으로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by kfiatlux 2026. 6. 23.

글 | 리 코토미(李琴峰) (작가)

옮긴이 | 홍기준

출처 | 리 코토미, 「친애하는 신체에게」, 『세카이(世界)』 2026년 3월호

『世界』(2026.03) ❘ 211–219쪽

 

멋대로 추가된 ‘활동가’라는 직함

 

 얼마 전, 내 저서의 외국어 번역본이 해외에서 출간되었다. 이것은 물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 해외판 저자 프로필에는 ‘작가·번역가’ 외에, 웬일인지 나에게 확인이나 양해도 없이 ‘활동가(액티비스트)’라는 직함이 멋대로 추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활동가’란, 사회나 정치 환경 등을 바꾸기 위해 시위나 강연, 로비 같은 사회 활동이나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념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돈을 할애하여 그런 활동에 종사하는 활동가를 나는 존경하며 그런 친구들도 여럿 있지만, 나 자신은 활동가가 아니며 그렇게 자칭한 적도 없다. 로비 활동을 한 적도 없고, 사회 계몽을 위한 강연 활동에도 별 관심이 없다. 분명 사회나 정치의 여러 문제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고 이를 대외적으로 발신하기도 하지만, 나는 활동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필가이다. 그런데 왜 해외 출판사가 멋대로 '활동가'라는 직함을 내 프로필에 추가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1]

 비슷한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내 위키백과 페이지가 있는데, 거기서도 역시 ‘활동가’라는 직함이 추가된 적이 있다. 근거로 제시된 것은 내가 LGBTQ+에 대해 쓴 한 편의 기사이다. 그 기사에서 나는 LGBTQ+를 둘러싼 일본과 대만의 현황과 역사를 소개한 뒤, 내 견해를 썼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내가 활동가라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 기사를 사회 활동이나 정치 활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필 활동으로서 쓴 것이다.

 나는 이해했다. 아무래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LGBTQ+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거나 쓰면 ‘활동가’가 되는 모양이다. 아마도 『세카이』에 쓰고 있는 이 연재 에세이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활동가’에 의한 ‘활동’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물론 소설이든 에세이든, 내가 무언가를 쓸 때 내 글이 누군가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오기를, 그리고 그런 작은 변화가 더 낫고 살기 좋은 사회로 이어지기를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 말이 사회를, 세계를 움직이는 지렛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그것은 평론가나 저널리스트를 포함해 많은 문필가들에게 공통된 생각 아닐까 싶다.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말은 평범함의 극치이며, 그런 말을 지향하는 문필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필 활동'은 분명 넓은 의미의 ‘사회 활동’이 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이다. 그런 일반론과는 상관없이 ‘이 주제에 대해 쓰면 활동가로 간주되기 쉬운’ 테마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 같다. 혹은 표현을 바꾸자면 '색깔이 입혀진다'고 말하기 쉬운 테마다. 이런 테마는 등장하기만 해도 작품 자체가 종종 '정치색이 짙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LGBTQ+는 틀림없이 그런 테마 중 하나로 꼽힌다. 여기에 경험의 불균형성이 있다.

 시스젠더이자 이성애자인 문필가가 신변잡기에 자신의 경험(예를 들어 결혼이나 출산)에 대해 써도 '정치색이 짙다'고 여겨지거나 '활동가'라고 불릴 것이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같은 사안(예를 들어 결혼을 못 하는 것이나 불임 수술을 강제당하는 것)에 대해 쓰면 다른 평가를 받을 게 틀림없다. 혹은 이성 커플을 위한 육아책은 세상에 무수히 많이 나와 있지만, 그런 책이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와 결부되어 이야기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동성 커플의 육아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정치적’이라고 여겨지고 실제로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의 삶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정치와 무관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치에 얽매여, 정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후자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의견에 대해 말하거나 쓰면, 그것만으로 전자의 사람들에게는 ‘활동가’가 된다. 하지만 오히려 물어야 할 것은, 나의 생존을 ‘활동’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대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무지할 수 있는 특권성

 

 나는 수많은 마이너리티 속성을 짊어지고 있다. 논시스젠더, 동성애자, 여성, 일본어 비원어민, 외국 국적자, 대만 출신자――그런 내가 삼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절감한 것은, 살아남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일본에서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으며, 출입국도 일본 국적자보다 엄격한 관리하에 놓여 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다수자인 일본 국적자와는 다른 권리와 의무를 나름대로 배우고 정리해야 한다. 무엇이 저항해야 할 부당한 차별에 해당하고, 무엇이 어쩔 수 없는 구별에 해당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싫든 좋든 체류 자격 구조나 출입국 관리의 역사, 나아가 정부의 외국인 정책이나 배외주의자의 혐오 발언 레토릭에 빠삭해지게 된다. 그것들은 내 전공이나 전문성이 아니라, 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이 나라에서는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 왜 이성애자와 같은 결혼 제도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마련되어 있지 않은지, 제도의 부재로 인해 어떤 불이익이 발생하고 있는지, 나는 나름대로 배우고 이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싫든 좋든 동성애자가 역사를 통해 겪어온 차별과 박해나 이성애 규범의 구조, 다른 나라의 제도, 혼인 제도의 역사, 파트너십 제도와 동성혼 소송의 현황, 나아가 일본국 헌법 제14조나 제24조에 대해 빠삭해지게 된다. 그것들은 내 전공이나 전문성이 아니라, 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별 전환 경험을 가진 여성이다.

 예컨대, 나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셀 수 없는 차별과 박해를 뚫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지금도 차별과 박해의 표적이 되고 계속 피해를 입고 있다. 왜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지, 왜 내가 살기 힘들게 사회가 만들어져 있는지, 왜 나 같은 사람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려는 사람이 있는지, 나는 나름대로 배우고 이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싫든 좋든 LGBTQ+와 백래시의 역사나 인간 사회에서의 성별 구조의 복잡성, 퀴어나 페미니즘 이론, 나아가 성동일성장애 특례법에 빠삭해지게 된다. 그것들은 내 전공이나 전문성이 아니라, 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나고 자란 나라는 국제 사회에서 국가로 공인받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도 강대국에 병탄될 위기에 매일 노출되어 있다. 내 국적도 이 일본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그 때문에 정체성이 왜곡되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

 왜 내 나라가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왜 강대국으로부터 침략의 표적이 되고 있는지, 나는 나름대로 배우고 이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싫든 좋든 중국과 대만의 역사나 국제 사회에서의 대만의 입지, 나아가 각국 정부의 대만에 대한 태도에 빠삭해지게 된다. 그것들은 내 전공이나 전문성이 아니라, 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자세히 알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사안들과는 평생 무관하고 무관심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이 나라에서는 다수파다.

 이 나라의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결혼 제도가 마련되어 있고, 자신에게 할당된 성별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으며, 적당한 나이가 되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자동으로 부여되고, 자신의 나라가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을 살아본 적도 없다. 헌법 제14조와 제24조나 파트너십 제도나 성동일성장애 특례법이나 미국의 대만관계법에 대해 전혀 몰라도, 그들은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메이저리티(다수자)의 특권이다. 무지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시부야구에서는 동성혼을 할 수 있다", "성별은 성염색체만으로 결정된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다" 등과 같은 오류를 천진난만하게 발언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진다.

 

‘시부야구(渋谷区)’에서는 동성혼이 가능하다?

 

 2025년 11월 28일, 동성혼 소송('결혼의 자유를 모든 사람에게' 소송)[2] 도쿄 2차의 고등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민법과 호적법의 제규정을 그 전까지의 삿포로, 도쿄(1차), 후쿠오카, 나고야, 오사카의 5개 고등법원은 모두 '위헌'이라고 단정했지만, 마지막 도쿄 고등법원 판결은 '합헌'으로 판단했다. 히가시 아유미 재판장에 의한 이 판결은 원고들의 주장과 처해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진지하게 직시하지 않고, 헌법 전문을 남용하고 논점을 흐리며 파트너십 제도나 성동일성장애 특례법 등 당사자들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겨우 쟁취한 성과조차 ‘합헌’의 근거로 삼은, 이해하기 힘든 부당한 것이다. 불평등의 현상을 추인하는 이 판결[3]의 문제점은 이미 많은 유식자(지식인)가 논하고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생략하겠지만, 인상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판결 당일 집회에서 단상에 오른 원고 중 한 명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방금 전 남동생한테 ‘합헌 판결 축하해’라는 축하 메시지가 왔는데 말이죠”라고.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자. 동성혼 소송의 원고단은 동성혼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현행 법제도는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원고단은 ‘현행 제도는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국가를 소송한 것이다. 즉, 원고단에게 바람직한 것은 ‘합헌’이 아니라 ‘위헌’ 판결이다(‘합헌’이 되면 현상 추인이 된다). 이는 동성혼 소송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인데, 그러나 원고의 가까운 가족조차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합헌 판결’을 기쁜 일로 착각하여 엉뚱한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 사안과 무관한 사람들의 이해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원고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원고의 남동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제소 후 7년 가까이 지나는 동성혼 소송은 이제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재판 중 하나가 되었다. 기일 때마다 방청은 추첨이 되고, 판결 당일에는 방청권을 구하기 위해 수백 명이 법원으로 달려간다. 판결이 나올 때마다 속보 뉴스가 뜨고, 신문 지면에서도 크게 다뤄진다. 그럼에도 이런 재판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닐까.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동성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 급기야 ‘시부야구에서는 동성혼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 것 같다.

 2015년, 도쿄 시부야구와 세타가야구(世田谷区)에서 일본 최초의 동성 파트너십 제도가 도입되었다. 파트너십을 ‘혼인에 상당하는 제도’라고 일부 미디어가 보도하는 바람에, ‘시부야구에서는 동성혼을 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착각이 퍼져버렸다. 하지만 실제 파트너십 제도는 결혼과는 거리가 멀고 실질적인 법적 효력은 거의 없다. 법률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법적 효과(상속, 친권, 체류 자격 등)의 대부분은 파트너십 제도로는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부야구에서 동성 파트너십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 이상 지났는데 아직도 ‘시부야구에서는 동성혼을 할 수 있다’는 착각이 남아 있다는 것은 꽤 심각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시부야구에서는 동성혼을 할 수 있다’――이 착각은 단순한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특권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혼인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당연하게 혼인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은 그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입장에 놓여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큰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혼인 제도는 헌법이나 민법으로 정해져 있는 국가 단위의 제도이다. 만약 일본국의 다른 곳에서는 동성혼을 할 수 없는데 시부야구에서만 그것이 가능할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밖에 없다――시부야구가 독립해서 시부야국이 되어 독자적인 헌법이나 민법을 가졌을 경우뿐이다. ‘시부야구에서 동성혼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그토록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

 

 2025년 11월 7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해 “무력 공격이 발생하면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전함을 사용하여 무력 행사를 수반하는 것이라면 ‘존립 위기 사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답변은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주로 리버럴파 지식인과 미디어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중국으로부터도 거센 반발을 사는 결과를 낳았다.

 총리의 발언은 언뜻 대만의 편을 들어 중국을 견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답변은 대만의 국제적 지위나 처해 있는 현상을 개선하는 실질적인 효과를 거의 가지지 못하며, "한마디 해 줬다"는 총리 개인의 자기만족에 머문다. 중국에 대한 도발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중일 간뿐만 아니라 대만 해협의 긴장도 높여버렸다.[4] 또한, 무엇이 '존립 위기 사태'에 해당하는지 명언함으로써 속내를 드러내버렸다는 비판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답변은 확실히 경솔했고, 여기서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해당 답변에 대한, 주로 리버럴파라 여겨지는 지식인이나 언론의 비판 중에서 대만 측의 시각을 너무나도 결여한 것이 많았다. 이 비판들에는 총리 못지않은 무지와 경솔함이 나타나 있다.

 11월 12일에 ‘평화를 원하고 군비 확장을 허용하지 않는 여자들의 모임’(다나카 유코・마에다 요시코 공동대표)은 「대만 유사에 관한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에 대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총리 답변에 우려를 표하고 평화로운 외교를 구축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대만을 언급하는 문장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구절이 있었다.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은 일본도 승인하고 있으며, 대만에 대한 무력 공격이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타국에 대한 무력 공격”이 아님은 분명합니다.[5]

 이러한 인식하에 성명은 대만에 얽힌 제반 문제[6]를 ‘중국의 내정’으로 치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조잡할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틀렸다.

 첫째, ‘대만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다. 이는 단순한 논리인데, 만약 대만이 이미 중국의 일부가 되어 있다면 애초에 통일을 할 필요도 없고, 무력 침공을 할 필요도 없다. 대만이 현재 중국의 무력 침공 야심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대만은 (적어도 아직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실제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대만은 계속 중국과는 다른 정치·경제 체제하에서 중국에 간섭받지 않는 사법부·행정부·입법부를 가지며 독자적인 역사를 걸어왔다. 중국과 달리 대만은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2019년에는 동성혼도 법제화되었다. 분명 대만은 국제 사회적으로 독립 국가로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중국의 일부는 아니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것은 중국 측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며 사실이 아니다.

 둘째,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은 일본도 승인하고’ 있다는 인식도 잘못되었다. 대만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규슈대학 준교수 마에하라 시호 씨가 설명하고 있듯이, 대만의 국제적 지위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일정한 모호함을 남기는 입장을 취해 왔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 측의 주장에 대해, 일본은 1972년 중일 공동 성명에서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말하는 데 그쳤으며 ‘승인’이나 ‘찬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 일본 정부의 입장에 대한 마에하라 씨의 설명은 핵심을 찌른다.

 객관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불가분한 일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측의 주장일 뿐, 일본은 그것을 ‘승인(recognize)’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은 (중략) 상대방의 체면에는 일정 부분 배려를 보이면서도 ‘찬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의의 여지는 남긴다’는 외교적 묘미를 지니고 있다.[7]

 이처럼 대만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며, 일본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그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원하고 군비 확장을 허용하지 않는 여자들의 모임’의 성명은 중국 측의 일방적인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가 굳이 모호하게 해 온 대만 문제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착각하고 있다. 급기야 대만 문제를 ‘중국의 내정’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고서 “대만이 중국으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아도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경솔할 뿐만 아니라 대만이라는 장소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압도적인 무지와 무관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대만은 2천3백만 명이 사는 곳이며,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름과 가족과 생활과 꿈이 있다. 중국으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거나, 혹은 통일되어 문자 그대로 ‘중국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무수한 인권 유린과 무수한 가정과 생명과 꿈의 괴멸을 의미한다. 현재로도 이미 침공의 야심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대만 시민은 신체와 자유를 희생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어 전쟁이라도 나면 국민이 최전선에 동원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대만 시민들의 갈등이나 고통에 '평화를 원하고 군비 확장을 허용하지 않는 여자들의 모임' 사람들은 조금도 마음을 써볼 수 없는 것일까.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애초에 특권이다. 평화를 원하는 것은 좋지만 중국의 침략을 허용하는 것은 평화고 뭐고 아니다. 평화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지금 중국이 대만에 대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침략 야심에 다름 아니다. 무력에 의해 현상을 일방적으로 변경하고 지역의 평화를 해치려 하고 있는 것은 대만이 아니라 중국 쪽이다. 정확히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 침공과 똑같은 짓을 중국은 기도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원하고 군비 확장을 허용하지 않는 여자들의 모임’은 정부에 대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할 것을 요구하는 요망서도 제출하고 있다. 2025년 9월 18일 자 요망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점령・박해・차별 속에서 살며, 국가로서의 승인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 및 총리가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주권 국가로서 정식으로 승인하는 자세를 명확히 보여주고 목소리를 낼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일본은 평화 국가로서 국제인도법을 존중하고 인권 존중과 민족 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외교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8]

 참으로 일본은 평화 국가이며 인권 존중과 민족 자결의 원칙에 입각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왜 ‘평화를 원하고 군비 확장을 허용하지 않는 여자들의 모임’은 대만의 국가 승인을 요구하지 않는가? 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해 온 ‘점령·박해·차별’이나 ‘국가로서의 승인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은 헤아리면서 대만 사람들이 강요받고 있는 침략의 공포에는 무관심한가? 그러한 표리부동이 ‘국제인도법’과 ‘인권’의 ‘존중’이란 말인가?

 팔레스타인은 지지하면서 대만의 상황에는 무관심한 일본의 전후 리버럴의 모순에 대해 스탠퍼드 대학의 충이팅(鍾宜庭) 씨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일본에게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멀리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3자로서 지원하는 입장을 취하기 쉽다. 반면, 대만은 일본이 당사자성을 면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깝기 때문에 대만이 직면한 제국주의적인 폭력을 인권의 관점에서 논하기 어려워진다.

 일본의 리버럴파는 오랫동안 전전 일본과 전후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해 온 역사가 있어, 중국에 의한 제국주의는 그런 틀에서 떨어져 나가 있어 보이지 않게 되고 또한 비판하기 어려워져 있다.[9]

 이 두 가지 이유에 대해, 나는 전자를 위선, 후자를 무지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국제법을 존중하고 인권을 옹호하며 제국주의를 비판한다면, 러시아도 이스라엘도 중국도 똑같이 비판해야 하며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대만 시민이 처한 상황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 충 씨가 논한 것처럼, 일본의 리버럴파가 대만의 상황에 대해 무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구 종주국 인간이 누리고 있는 특권적인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특권성의 한계를 안다

 

 무지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이렇듯 말하는 나도 수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 나는 비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인이나 난치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사회 속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대해 자세히 알지 않아도 된다.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경제적으로도 곤란하지 않기에 빈곤층의 고충을 반드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런 것들은 나의 행운인 부분이다.

 ‘특권’은 ‘악’이 아니며, 하물며 ‘죄’도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스젠더 이성애자인 것도, 일본인으로 태어난 것도 전혀 나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특권을 가지고 있어 무지함을 허락받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그 위에 시야를 넓혀 모르는 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경험 앞에서는 겸허해지고 당사자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는 것―그렇게 한다면 이 세계는 조금 더 숨쉬기 편한 곳이 될 것이다.

 나는 활동가가 아니지만, 스스로의 앎의 한계를 확장하는 그런 활동은 매일 실천할 생각이다.

 

[필자 주]

 

 [1] 문제의 프로필은 나의 요청으로 수정되었다.

 [2] 도쿄에서는 서로 다른 원고단에 의해 두 번 제소되었기 때문에, ‘도쿄 1차’, ‘도쿄 2차’로 불리고 있다.

 [3] 『아사히 신문』 기사나 『도쿄 신문』 사설 참조. 활동가 마쓰오카 소시 씨나 히라솔 법률사무소의 기사 참조.

 [4] 2025년 12월 말, 중국은 대만 주변에서 ‘정의사명(正義使命)―2025’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5] 평화를 원하고 군비 확장을 허용하지 않는 여자들의 모임 ‘대만 유사에 관한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에 대해’

 [6] 이른바 ‘대만 문제’는 영어로는 ‘Taiwan Issue’로 ‘대만의 지위·주권·국제적 취급을 둘러싼 종합적인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만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7] 마에하라 시호 「신문조차 틀린 ‘대만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 『도요게이자이』

 [8] 평화를 원하고 군비 확장을 허용하지 않는 여자들의 모임 ‘일본 정부가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서 승인할 것을 요구하는 요망서’

 [9] 충이팅 「전후 일본 리버럴은 대만에 무관심하고 무이해.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 답변으로 다시금 알게 된 중국에 침묵하는 구조 문제」 『도요게이자이』

 

[옮긴이 주]

 

 해당 없음.

 

필자 | 리 코토미. 대만 출신 일본어 작가로, 일본어 문학과 에세이를 통해 젠더, 국적, 언어, 소수자 재현의 문제를 비평적으로 다뤄 왔다.

 

옮긴이 | 홍기준.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재학생으로, 동아시아미디어론 수업에서 일본 미디어 텍스트의 사회적 맥락과 소수자 재현을 비평적으로 읽고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