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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디어 번역과 해제

리크루트 슈트를 통해 본 동조 압력

by mynote53158 2026. 6. 23.

 

리크루트수트_번역최종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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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크루트 수트

글 | 다카하시 준코(高橋純子)

옮긴이 | 송지연 (2023110241)

출처 | 『세계(世界)』 2026년 3월호

 

번역문

봄이 오면 거리 곳곳에서 검은색 리크루트 수트를 입은 젊은이들을 드문드문 마주치게 된다. 남성들의 경우 아직 정장이 몸에 익지 않아 마치 옷에 사람이 입혀진 듯 겉도는 느낌이 강하다.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온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여성들의 모습은 어쩐지 더 애처롭게 눈에 밟힌다. 내가 여성이라 더 감정이 이입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은 재킷에 검은 타이트 스커트나 바지를 입고 있다. 머리카락은 뒤로 낮게 묶어 하나로 모았고, 메이크업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출했으며, 낮은 굽의 검은 구두를 신은 채 네모난 검은 가방을 손에 들고 있다. 누가 봐도 일목요연한 취업 준비생의 모습이다. 마치 온몸에 "저는 지금 취업 활동 중입니다"라는 투명한 어깨띠를 두르고 있는 것만 같다.

  예전에 지하철 안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던 리크루트 수트 차림의 여성을 본 적이 있다. 옆 좌석에 조심스럽게 짐을 내려놓은 그녀는 팽팽한 긴장감을 풍기며 필사적인 표정으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이마와 콧망울의 번들거림을 파우더로 꾹꾹 눌러가며 매만지는 손길이 분주했다. 그녀 역시 면접관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호감 가는 미소를 지어 보일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그 감정의 전환 스위치를 켜는 걸까. 평소에는 어떤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 아이일까.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스스로를 불편한 틀에 가두어야 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나의 옛 취업 활동 시절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향해 힘내라는 작고 조용한 응원을 보냈다.

'리크루트 수트'는 전형적인 일본식 영어다. 일영사전을 찾아보면 면접용 정장을 뜻하는 'an interview suit'나 어두운 정장을 뜻하는 'dark suit'로 번역된다. 아사히신문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보면 지면에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3년 9월 8일 자 석간의 익명 칼럼 '경제기상대'였다. 당시 칼럼은 교복과 멀어진 오늘날의 학생들이 치열한 취업 경쟁에서 기업 채용 담당자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얻기 위해 남녀 불문하고 리크루트 수트라는 무개성적인 복장을 입으며, 학생들의 안정 지향 성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무개성하고 중심이 잡히지 않은 학생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일본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복잡한 심정이 든다고 덧붙였다. 리크루트 수트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첫 등장부터 그리 좋지 못했고, 비판의 핵심이 '무개성'이라는 점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참고로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자 대학생들은 대학 교복과 모자를 착용하고 통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취업 면접 역시 그 차림으로 임했다고 한다.

  위 칼럼이 쓰인 1983년은 일본에서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 성립되기 2년 전이다. 칼럼은 당시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기업이 우위를 점하는 시장이 지속되고 있지만, 대졸 여성에 관해서는 채용 인원을 늘리는 기업이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성을 직장의 꽃으로만 보던 시선에서 벗어나 비로소 커리어 우먼이라는 존재를 겨우 인정하기 시작한 징후였을 것이다. 다만 당시 여성의 복장은 아직 과도기여서 완전히 획일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 패션 잡지 『non-no』의 1982년 9월 20일 호에 실린 특집을 보면 면접 날 스타일로 남색 블레이저와 무릎 아래 길이의 박스 스커트, 흰 블라우스에 남색 리본 타이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1980년대 전반까지는 상하의를 다르게 맞춰 입는 세퍼레이트 형태도 용인되었다. 이후 여성의 취업 복장은 시대를 타며 변해왔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는 어깨 패드를 두껍게 넣어 상체를 강조한 역삼각형 실루엣이 유행하다가 1998년 전후로 어깨의 과장된 거품이 사라지고 재킷의 앞여밈은 싱글 버튼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내가 취업 활동을 했던 것은 1992년이었다. 당시 입사 시험의 소논문 주제는 버블 경제는 왜 발생했고 왜 붕괴했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버블은 이미 꺼져가고 있었지만 사회에는 여전히 활기찬 여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 규슈 시골에서만 자란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도쿄 땅을 밟았고,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 면접장으로 향했다. 그때 내가 선택한 옷은 당시 유행하던 DC 브랜드의 정장이었다. 연한 베이지색에 라운드 넥 노칼라, 허리는 잘록하고 밑단이 화려하게 퍼지는 롱 페플럼 재킷과 무릎 길이의 타이트 스커트 세트였다. 재킷에는 물론 두꺼운 어깨 패드가 들어있었고 앞여밈에는 지름 2센티미터쯤 되는 장식용 은색 단추가 대여섯 개나 박혀 있었다. 신발은 베이지와 검은색이 매치된 에나멜 콤비 펌프스였던 것 같으니, 지금 기준에서 보면 취업 준비생이 아니라 유흥업 종사자로 오해받기 딱 좋은 차림이었다.

  하지만 나만 특별했던 것이 아니다. 면접장에는 연보라색 더블 재킷에 타이트 스커트를 입은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화이트 계열의 스포티한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남성들 역시 다크 수트를 입긴 했지만 실루엣이나 넥타이에서 각자의 개성과 여유가 묻어났다. 남들과 똑같은 건 질색이라는 자기주장과 자부심이 가득했던 시대였다. 면접장에서 만난 어떤 여성은 NHK 면접을 보러 갔더니 면접관이 1시간 넘게 기다리게 하길래 지루해 죽겠다고 한마디 해줬다며 당차게 말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놀랍게도 NHK와 아사히신문 양쪽 모두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처럼 활기차고 당당한 시대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온 나로서는, 도대체 언제부터 어쩌다가 전국의 모든 취업 준비생이 새까맣게 물들어버린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봄이 돌아올 때마다 사회 전체에 거대한 사기를 당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누가 억지로 강요한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가 스스로 획일화의 길을 택했다는 사실이 솔직히 소름 끼치도록 기이하고 기분 나쁘게 느껴진다.

  2010년대에 몇 번 채용 면접관으로 참여했을 때, 정석적인 흰 셔츠가 아니라 푸른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온 여성이 눈에 띄어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그녀는 리크루트 수트를 아예 안 입는 건 너무 불안해서 차마 용기가 안 나 고민 끝에 안의 셔츠만이라도 제가 좋아하는 색으로 바꿔 입고 왔다고 답했다. 고작 셔츠 무늬 하나 바꾸는 데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는 그녀의 답변을 듣고 있으니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물론 나는 그녀의 주체성에 기꺼이 높은 합격점을 주었다. 리크루트 수트는 흔히 무개성과 순종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비판받고, 때로는 비웃음과 기피의 대상이 된다. 취업 준비생뿐만 아니라 인재를 채용하는 기업 측에서도 모두 똑같아서 알아보기 힘들다며 불평을 쏟아낸다. 그렇다면 다 함께 안 입으면 그만 아닐까 싶지만, 모두가 싫어하면서도 그 누구도 이 대열에서 이탈하지 못한다. 이 기현상의 원인은 일본 사회의 강력한 동조 압력이나 젊은 세대의 성향으로 설명되곤 한다. 어떤 이들은 일부러 같은 옷을 선택한 뒤 그 안에서 허용된 미세한 차이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므로 무조건적인 동조라 볼 수 없으며, 면접관들 역시 획일성 속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차이를 감각적으로 알아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작년에 대학 강단에서 자유의 가치에 대해 강의할 때 리크루트 수트에 대한 나의 위화감을 학생들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여러분에게 리크루트 수트를 입지 말라고 강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혹한 요구일 테니, 겉은 똑같더라도 안에는 화려한 속옷을 입는다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색의 손수건을 주머니에 슬쩍 넣어두며 획일화된 시스템에 나만의 방식으로 작은 저항의 의지를 다져보라고 제안했다. 그것이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자 한 여학생이 내게 다가와 나직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자신은 그냥 리크루트 수트를 정석대로 입겠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옷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나의 내면과 알맹이가 면접관에게 더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이었다. 남들과 다른 옷을 입었다는 사소한 이유 하나로 튀어 보이고 색안경 낀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면 오히려 손해라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취업 준비생들이 리크루트 수트를 입는 가장 큰 동기는 결국 패션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함에 있다. 눈에 띄면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고 작은 실수나 부정적인 행동도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에,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방어 기제가 동일한 수트를 고르게 만드는 것이다. 여학생의 말을 들으며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하다는 식으로 한데 묶어 비판했던 내 태도를 깊이 반성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들의 거리가 온통 검은색 일색인 이 풍경만큼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최근에야 취업 복장의 역사를 다룬 『리크루트 수트의 사회사』라는 책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1980년대 버블기에 리크루트 패션이 누렸던 개성과 자유는 사실 일본 기업의 성장과 경제적 번영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사회적 여유의 산물이었다. 여러 지원 직종의 분위기에 맞춰 서로 다른 스타일의 정장을 몇 벌씩 구매할 수 있었던 개인의 경제적 구매력이 자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셈이다. 책은 버블 붕괴와 함께 그 물질적 근거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고 지적한다. 1990년대 이후 취업 빙하기를 거치며 남성의 수트는 가장 안전한 표준 형태로 회귀했고 여성의 수트 역시 기업의 입맛에 맞춘 엄격한 표준 안으로 수렴되어 갔다. 경제적 여유와 사회가 허용하는 자유의 총량이 정확히 비례한다는 사실은 서글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검은색 리크루트 수트의 정착은 일본 사회와 경제가 그만큼 가난해졌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당장 무너진 경제를 되살릴 수는 없다면 우리는 우선 내면의 자유를 되찾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최근 중도 채용이 늘고 수시 채용이 도입되는 등 노동 시장의 유동화가 진행 중이라고는 하지만 대졸 신입 사원을 한날한시에 뽑는 일괄 채용이라는 일본 특유의 관행은 여전히 뿌리 깊다. 물론 이 시스템에도 장점은 있겠지만 시대에 뒤처진 제도라면 끊임없이 점검하고 재검토해야 마땅하다. 제도가 만들어 놓은 틀에 과도하게 자신을 욱여넣고 시스템에 맞게 내 영혼까지 개조해 나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심성이야말로 작금의 일본 사회를 덮고 있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공기의 원흉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질적 저하와 경직성 역시 이 획일화된 심성으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결국 본질은 이것이다. 우리 모두가 겉모습을 넘어 자신의 사고방식에까지 꽉 막힌 리크루트 수트를 입혀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스템 따위는 인간의 상상력과 의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인데도, 제도에 길들여져 스스로 상상력의 손발을 묶어버려서야 되겠는가.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주인공 호빵맨의 주제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위해 태어나,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가. 이제는 우리의 영혼을 옥죄고 있는 사고의 리크루트 수트를 과감히 벗어던져야 할 때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날것의 맨몸으로, 주체적인 나 자신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 없이 굴러가는 부품이 아니라, 저마다의 빛깔로 펄떡이며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

다카하시 준코(高橋純子)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칼럼니스트.

1968년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났으며,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90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 편집위원,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치·사회·문화 분야를 중심으로 활발한 집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일본 사회에 존재하는 동조 압력, 성 역할, 정치 문화, 청년 세대 문제 등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석하는 글로 주목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しょうがない帝国』, 『わくわくしない日本』, 『政治家の覚悟』 등이 있다.


[옮긴이 소개]

송지연은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에 재학 중이다. 일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언어 자체보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사회에 더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현재는 일본 사회와 문화를 다양한 미디어 텍스트를 통해 탐구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미디어론 수업을 통해 일본의 취업 문화와 청년 세대가 겪는 사회적 압력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번 「리크루트 수트」 번역 역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취업준비생들의 모습은 단순한 복장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번역 과정에서는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는 동시에, 일본 사회의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고민이 한국 독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서로 다른 사회를 이해하는 일은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번 번역은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 작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