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존재하기 위한 늙음: 요나스와 아렌트의 대화
저자 : 도야 히로시 (리쓰메이칸대학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부교수)
옮긴이 : 윤이레
출처 :世界 SEKAI 2026.03
시작하며
최근 안티에이징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고도 의료 현장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드러그스토어에서도 노화 방지 기술을 활용한 상품들이 대량으로 진열되어 있다. 현대 사회는 ‘늙음’을 극복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며, 이를 위해 다양한 상품을 소비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요구한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적·경제적 비용을 개인이 감수하도록 몰아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늙음을 그 자체로 바라보기보다 저항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안티에이징 기술의 안전성과 과장 광고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지만, 그 근저에 자리한 ‘늙음’ 자체에 대한 부정적 가치관은 성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노화를 거부하는 태도는 과연 자명한 것일까? 그리고 늙음은 정말 기술을 통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일까?
독일 출신의 유대계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는 주저 『책임이라는 원리』(1979)에서 과학기술 문명이 지닌 잠재적 위험성을 지적하며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그의 논의는 바이오기술을 통해 노화를 방지하려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린다.
그렇다고 요나스가 노년의 삶을 무조건 낙관하거나 긍정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늙음은 어디까지나 인생의 엄연한 '중압'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존재론적 중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를 고찰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이하에서는 요나스의 말년 저작들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동시에, 그의 사상적 여정에 늘 동행했던 친구이자 동시대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와의 상호 영향 관계를 시야에 넣어, 이 문제에 대해 요나스가 어떠한 철학적 답을 제시했는지 밝히고자 한다.
바이오기술에 대한 비판
과학기술은 무한히 진보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로 인해 인류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이것이 『책임이라는 원리』에서 제시된 요나스의 핵심 주장이다. 이 책에서 요나스가 가장 근본적인 위협으로 간주한 것은 핵무기처럼 인간에게 즉각적인 파멸을 초래하는 기술의 오남용이었다. 그러나 위협은 파괴적 기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겉보기에는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기술 역시, 사용 방식에 따라 더 은밀하고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할 수 있다.
요나스가 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바이오기술이다. 어떤 생명공학 기술은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고 인류의 건강에 기여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존엄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사태를 초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며 순식간에 사회 전체로 보급된다.
더욱이 과학기술은 일단 사회에 도입되면 그 전개 과정을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할 때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되지 말고, 장기적인 파급 효과까지 시야에 넣으며 '최악의 결과'를 항상 예측해야 한다. 요나스는 과학기술이 초래할 윤리적·법적·사회적 파국을 미리 내다보고 경계하려는 이러한 사유 방식을 “공포에 기반한 발견술(heuristics of fear)”이라고 불렀다.
요나스는 경계해야 할 대표적인 과학기술로 ‘불사의 기술’을 꼽는다. 만약 미래에 어떤 의학적 방법으로 인간의 수명을 기술적으로 무한히 연장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많은 이들이 이 기술을 환영하겠지만, 요나스는 그것이 인류 전체에 파멸적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의 수용 능력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출산을 중단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식량 부족과 만성적 기근, 나아가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불사(不死)를 손에 넣은 인류는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을 낳지 못하도록 강제당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아이의 탄생은 세계에 “타자성 그 자체의 유입”을 의미하며, “세계를 처음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원동력이다. 만약 출생이 멈춘다면,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고 변혁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그 결과 세계는 이미 존재하는 낡은 해석과 가치관으로만 가득 차, 어떠한 새로움도 태어나지 않는 정체된 장소로 전락할 것이다. 인간은 단조롭고 반복적인 루틴 속에 매몰되어 살아가게 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인류 생명력의 소멸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아이의 탄생을 단지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도구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불사가 실현되어 출생이 멈춘 세계, 즉 “젊은이가 없는 노인들만의 세계”와, 인간에게 유한한 수명이 주어지는 대신 계속해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세계 중 어느 쪽이 인간다운 세계인가를 묻는다면, 요나스는 단연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요나스는 이러한 관점을 그의 오랜 벗이었던 한나 아렌트의 “출생성(natality)” 개념에 기대어 전개한다. 출생성이란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정립한 철학적 개념으로, 인간 조건(conditio humana)을 구성하는 가사성(可死性, 죽을 수밖에 없음)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속성이다.
요나스에 따르면 출생성이란 “우리 모두가 태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이며,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점에 고유한 단독자로서 “여기에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경이로운 성질이다. 출생성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언제나 “세계를 처음으로 바라보는 자”, 즉 새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익숙함에 마비된 일상에서 새롭게 경탄하며, 타인이 이미 도달해 버린 지점에서 다시 출발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태어남을 의미한다.
요나스의 윤리사상은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도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존속해 나가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렇기에 그는 미래 세대 역시 이러한 '출생성'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까지를 현재 인류의 책임 범주에 포함시킨다. (다만 요나스가 재해석한 출생성 개념은 아렌트 원전의 맥락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이방인으로서의 노인
인간은 늙고 죽어 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유한성이야말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조건이 된다. 이것이 요나스가 노년에 대해 일관되게 주장한 철학적 뼈대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설령 수명의 한계(죽음)는 받아들이더라도, 생명공학 기술을 통해 노화 자체만 억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즉, 늙음의 부정과 아이의 출생이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늙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질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피부의 주름을 의료기술로 완벽히 제거했다고 가정하자. 표면적인 외형만 본다면 노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같은 기술을 전신의 모든 세포에 적용해 신체를 완벽한 청년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은 정말로 늙지 않은 것일까?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 내릴 수 없다. 외모가 젊은 진짜 20세 청년과, 90세에 안티에이징 기술을 시술받은 노인이 있다고 하자. 20세 청년의 시선에서 보면 90세 노인은 그의 행동 방식, 기억, 사고의 깊이 때문에 여전히 “늙은이”로 다가온다. 반대로 90세 노인 역시 청년의 미숙한 말을 들으며 세대적 격차를 실감할 것이다. 신체 표면의 변화가 없더라도 인간은 늙음을 내적으로 감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단순히 "시간의 경과가 곧 늙음인가?"라는 질문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가령 10세 아동과 20세 청년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20세 청년을 두고 10세 아동보다 "10년 치 더 늙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색하다. 즉, 늙음은 단순한 물리적 시간의 흐름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늙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나스는 이를 “방대한 기억의 축적”으로 설명한다.
고령에 이른다는 것은 인간이 내면에 거대한 과거를 품게 된다는 의미이며, 그 과거의 정신은 현재의 삶 속에 필연적으로 스며든다. 우리 안의 과거는 살아온 세월만큼 증대되며, 거기에는 지식과 가치관, 감정, 판단력, 체득한 기능과 습관이 축적된다. 나아가 의식적으로 인지하든 망각했든 간에, 삶에 새겨진 무수한 사건들이 저마다의 무게를 지닌 채 인격 내부에 켜켜이 쌓인다.
따라서 “늙어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의 서사 속에 방대한 기억과 연륜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기억은 과거와의 관계 맺기이며, 노인이란 기억을 매개로 현재의 자기 동일성, 즉 “인격의 동일성” 안에 무겁고 풍요로운 과거를 통째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을 통해 90세 노인이 20세 청년의 육체를 지니게 되더라도, 그가 축적해 온 막대한 기억의 무게 때문에 그는 본질적으로 노인일 수밖에 없다. 또한 흐른 시간의 총량이 다르기에, 세포가 젊다고 해서 그가 청년과 같아질 수는 없는 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늙음은 어쩌면 죽음보다도 기술적으로 거부하기 힘든 인간의 본질이다. 기술로 노화를 완전히 멈추려면 흐르는 시간 자체를 막거나, 노인의 뇌에서 시간의 증거인 '기억'을 강제로 거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전자는 물리적 공상에 불과하며, 후자는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파괴하는 인위적인 뇌사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격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생존하려는 한, 늙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요나스에 따르면, 이러한 기억의 두께는 현재를 살아가는 판단과 행동의 속도, 즉 삶의 “보폭”의 차이로 나타난다. 노인은 풍부한 과거의 지평을 지니고 있기에 눈앞의 격변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고 신중하다. 반면 젊은이는 축적된 경험이 없기에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한다.
그 결과 청년 세대의 판단과 행동은 노년 세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사회의 주도권이 젊은 세대로 넘어갈 때, 노인은 사회의 변화 속도가 지나치게 가파르다고 느끼게 된다. “세계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며”, 인간은 결국 자신보다 늦게 출발한 후행 세대의 속도에 추월당할 수밖에 없다. 요나스는 자신이 노년에 접어들며 겪은 세계와의 이러한 불화와 어긋남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우리가 늙어 갈 때, 신체적 상태와 무관하게 우리는 세계로부터 일종의 퇴장 신호를 받게 된다. 나 자신을 예로 들자면, 나는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시각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감수성을 거의 잃지 않았다. 과거부터 사랑해 온 예술 작품들에는 여전히 깊이 감동한다. 그러나 동시대의 현대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낯설며,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내가 사는 이 세계 속에서 하나의 ‘이방인(Fremdling)’이 되어 버린 듯한 감각을 느낀다.”
노인은 결국 자기가 이룩한 세계에서 조차 “이방인”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다. 이는 앞서 설명한 출생성과 가사성의 상보적 관계와 직결된다. 인간은 늙고 죽어가기에 새로운 세대가 세계에 진입할 수 있고, 그 청년들이 예측 불가능한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노인의 시선에서 이러한 변화를 바라본다는 것은, 평생 익숙했던 세계와 서서히 결별하며 점차 미지의 세계로 밀려나는 쓸쓸한 소외의 경험이기도 하다.
특별히 늙는다는 것
인간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화하고 소멸한다는 사실이 생태계나 인류 전체의 순환 차원에서 아무리 바람직하다 한들, 정작 늙어가는 당사자 개인에게도 과연 행복한 일일까? 인생의 황혼기에 자기가 살던 세계에서 한 명의 “이방인”으로 소외되어 가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 실존에 대한 지나치게 비관적인 초상화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노화라는 숙명 자체에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내재적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요나스는 자신의 텍스트에서 이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다만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1974년 한나 아렌트와 나눈 대화다.
이 논의는 두 사람이 재회하여 아렌트의 생일을 축하하던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축하 파티 도중 자연스럽게 “인생에서 늙어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요나스는 그날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몇 년 전, 평생의 벗인 한나 아렌트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늙는다는 현상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 가지 점에서 깊이 공감했다. 노년기란, 지난 인생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마침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시기라는 점이다. 노년에 이르면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인정받는지조차 크게 개의치 않게 된다.”
이 대화에서 두 철학자가 합의한 핵심은, 늙음에는 인간을 세속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해방의 측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노인은 이방인으로서 세계를 경험한다'는 통찰과 긴밀히 연결된다. 현재의 세계는 더 이상 “내가 주도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노인은 타인의 평판이나 사회적 압박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요나스는 아렌트와 이 점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아렌트가 보낸 생각은 어떠했을까. 파티가 끝난 후 요나스가 감사의 편지를 보내자, 아렌트는 노년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담아 답장을 보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함께 나이를 먹어 어느덧 서로에게 세상 그 누구보다 오래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완수해야 할 과업이 있으며, 그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유일한 소명입니다.
당신은 노년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자유’라고 표현했습니다만, 나는 당신이 단지 수동적인 머무름을 뜻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그 사람답게 되어간다’고 말하듯, 늙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오랜 세월 새겨져 있던 고유한 본질이 마침내 표면 위로 온전히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즉,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있는 그대로의 참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아렌트의 해석에 따르면, 요나스가 말한 노년의 자유는 단순히 현상 유지에 머무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외부의 기대와 사회적 가면(페르소나)으로부터 초연해지며, “타인의 요구에 맞춰 늙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해방된다. 노인은 비로소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 삶의 마지막 장을 진정한 단독자로서 직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늙음의 적극적인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노인은 현재의 세계 속에서 서서히 이방인이 됨으로써, 도리어 타인의 시선에 저당 잡혔던 과거와 결별하고 전혀 새로운 실존의 가능성을 획득한다. 청장년 시절에는 가로막혔던, 오롯이 자기다운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 살아갈 자유”를 노년에 이르러 비로소 선물 받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안티에이징 기술에 매달려 이러한 늙음의 섭리에 저항하고 끝까지 청년의 상태로 세계에 유착되려 한다면, 우리는 노년이 선사하는 “있는 그대로 존재할 해방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맺으며
지금까지 살펴본 요나스의 노화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 과학기술은 인간에게서 죽음을 박멸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출생의 고리를 끊어 인류의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불사의 기술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한편, 기술을 통해 외형을 바꾼다 한들 노화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늙음이란 삶의 궤적이 남긴 방대한 기억의 축적 그 자체이자 인간 존재의 철학적 숙명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거대한 과거의 무게를 지닌 존재이기에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현재의 격변에 온전히 동화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세계 속에서 이방인의 고독을 겪는다.
그러나 바로 그 소외와 이방성 덕분에 노인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세상의 평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참된 자신”으로 살아갈 존재론적 허락을 받으며, 자기다운 삶을 완수할 마지막 가능성을 얻기 때문이다.
요나스의 노화론은 언제나 아렌트의 사상과 조응하며 움직였다. 그는 불사 기술의 위험성을 그녀의 “출생성” 개념을 빌려 논박했고, 노년의 고독이 어떻게 해방의 자유로 승화될 수 있는가 역시 그녀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다듬어 나갔다.
1975년, 아렌트는 세상을 떠났다. 두 철학자가 노년의 자유를 논했던 그 아름다운 파티가 있은 지 불과 이듬해의 일이었다. 요나스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 추도문을 낭독하며 그날의 대화를 내내 반추했다. 요나스가 말년의 아렌트에게 바친 추도사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어쩌면 이 절절한 약속이야말로 두 사상가가 도달하고자 했던 “있는 그대로 존재함”의 참된 의미였을 것이다.
“한나, 지난해 우리는 우리의 50년 세월을 함께 축하했었지.
우리는 우리의 젊은 날이 어떤 바람 속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추억했어. 불트만 교수님이 새로 시작하셨던 신약성서 세미나 강의실에서, 우리 둘만이 유일한 유대인 학생이었던 시절을 말이야. 우리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세대가 얼마나 거친 폭풍 속을 걸어왔는지 이야기했다.
우리는 오랜 역사 동안 견고하게 이어져 온 인간 세계의 도덕과 선악의 기준이, 마치 폭풍에 휩쓸리듯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파국을 함께 목도해야 했지. 그 혼돈 속에서도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 무엇이 가치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단호히 경멸해야 하는지—그 본질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는 칠흑 같은 시대 속에서 늘 확실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지.
지금 이 자리에는 너를 기리고 찬양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동료와 제자들이 있단다. 그러나 너와 내가 맺었던 영혼의 유대는,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된 삶의 근간이었어. 비록 우리 중 누구도 그 깊이를 세상을 향해 소리 높여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나, 너는 네게 주어진 실존적 신념을 마지막 순간까지 품고 살았지. 네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유의 끈을 놓지 않았듯이, 남겨진 우리 또한 그 신념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걸어갈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것이 오늘 내가 너의 영전 앞에서 바치는 우리의 엄숙한 약속이란다.”
[필자 소개]
도야 히로시(戸谷洋志)
198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철학과 윤리학을 전공하고, 현재 리쓰메이칸대학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부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주로 기술 사상과 미래 윤리학을 깊게 연구하고, 사회 속 대화의 장을 제안하는 ‘철학 카페’를 운영하기도 한다. 한스 요나스와 마르틴 하이데거 등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오늘날 디지털·과학기술 사회의 윤리적 문제를 날카롭게 짚어내는 유망한 소장학자이다.
[옮긴이 소개]
윤이레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시사 이슈에 흥미가 있으며, 폭넓은 분야, 특히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분야의 사회문제 분석 및 토론에 높은 관심을 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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