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은 교육인가? :교사와 학생이 보는 풍경에 대해 이토 세쓰코 씨에게 묻다
글: 武田砂鉄/다케다 사테츠(작가)
옮긴이: 방치완
출처: 세카이(世界) 2026년 3월호
들어가며
자신이 받아 온 교육에 대해 연재한다면, 제가 학생 시절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과 이야기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도쿄 교외의 중·고교 일관교에 다녔습니다. 다른 중학교에 다녔다가 고등학교 때 들어오는 학생도 있지만, 6년 동안 같은 학교에 다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학에는 열심히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시절의 추억은 이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 가장 많습니다. 자신의 인격 형성에는 꽤 큰 영향을 준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6년 동안, 담임이나 중학교 학년 주임을 맡아주신 것이 이토 세쓰코 선생님입니다. 제가 졸업한 뒤에 교장이 되셨고, 현재는 NHK학원고등학교에서 부교장을 맡고 계십니다. 학교 선생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때, 저희를 가르치면서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그것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비서에서 교사로
다케다: 이토 선생님은 저의 중학교, 고등학교 6년 동안 줄곧 저희 학년을 담당해 주셨습니다만, 선생님은 어떤 경력을 거쳐 오셔서 선생님이 되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애초에, 왜 선생님이 되려고 마음먹으셨나요?
이토: 아버지, 어머니, 조부모님, 언니, 남동생도 선생님이라서, 선생님이 가업 같은 것이었습니다. 대학 심리학 선생님에게서 “당신은 너무 선생님 같으니까, 교사가 되는 편이 좋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항상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다만, 바로 선생님이 된 것은 아닙니다. 대학 졸업 뒤, 남편의 영국 유학에 동행하여 런던의 옥스퍼드 스트리트 근처 사무실에서 경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케다: 전혀 몰랐습니다. 선생님 일가에서 “왜 선생님이 되지 않는 거야?”라는 말은 듣지 않았나요.
이토: 영국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겠지, 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 다이애나 왕비가 결혼한 시기로, 큰 열풍이 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회계 관련 총무를 맡았지만, 중간부터는 현지 법인 사장의 비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다케다: 그거, 당시 학생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날부터 저 같은 학생에게 ‘요, 사장 비서!’라고 불렸을 테니까.
이토: 귀국할 무렵에는 유럽과 인도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그렇게 나리타공항에 돌아와서 다음 날, 모교의 대학 취업과에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요…” 하고 상담하러 갔습니다. 거기에서 소개받은 것이 약 40년 가까이 근무하게 된 학교입니다. 처음에는 비상근으로 채용되었고, 2년 뒤 전임 교사로 채용되었습니다.
다케다: 당시 교원 지원자는 많았나요.
이토: 아마 많았을 겁니다. 사실 그 학교의 채용시험에 한 번 떨어졌고, 다른 학교에도 취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3월 말에 비상근 선생님이 갑자기 빠져서, 대신 들어가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전임이 된 것은 1986년이고, 마지막에는 교장으로서 2013년까지 40년 가까이 같은 학교에서 일했습니다.
문화제에서 성경 콩트를
다케다: 제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공학이었지만, 이토 선생님이 된 무렵은 아직 남학교였지요.
이토: 그렇습니다. 다케다 군 학년이 입학하기 4년 전부터 공학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남자학교였고, 전임 채용 당시 여성 전임 교사는 네 명뿐이었습니다. 그중 두 분은 50세 안팎이었으니, 저는 얼마 없는 젊은 여성 교사였습니다. 출석부를 열었더니 안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오는 장난을 당하기도 했고, 사춘기의 뜨거운 시선을 받는 경험도 했습니다.
다케다: 공학이 되면서 학교 분위기도 꽤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이토: 다케다 군이 다닐 때는 이미 남녀공학이 된 뒤 한참 지나서 적응이 돼 있었습니다만, 처음엔 매우 힘들었습니다. 급히 여자 화장실을 증축해야 했고, 남자학교 시절부터 오래 계셨던 선생님들이 여학생과 어떻게 접해야 할지 어려워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남학교에서 공학으로 전환된다는 것이 매우 임팩트가 커서, 공학 1기생 입학 시험에는 약 2,000명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다케다: 선생님 앞에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저희 때도 모교 중학교는 제1지망으로 받기보다 제2, 제3지망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원치 않은 입학이었을 수도 있지만, 입학해 보니 개성이 독특한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그건 저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꽤 편안했고 자유로운 분위기도 있었지요. ‘자기 일은 스스로 생각하라’는 슬로건을 자주 들었죠. 그것도 하나의 가르침이었네요.
이토: 지금 생각하면 조금 자유가 지나쳤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자립한 인간으로”라는 학교의 교육 목표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의 같은 세대에, 자신이 중고등학교 시절 학생회장을 맡는 등 자치 활동을 열심히 해 온 교원이 많았습니다. 다케다 군 일행의 학년 담당에도 여러 명 있었고, 학생이 주체적으로 생각해 온 활동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강한 학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케다: 선생님보다 조금 위 세대에는 남자학교적인 사고방식이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역시 너무 자유로우니까 그 나름대로 관리하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는 식이 되어 갔던 걸까요.
이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죠”라는 말투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었죠. 그렇지 않으면 수습되지 않는 상황도 있었고, 그것도 잘 압니다. 또 공립중학교 학생들이 거칠어졌던 때에 중학생 생활을 보내고, 관리가 강한 방식에 익숙해져 온 것인가 하고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다케다 군 일행의 학년 담당자들은 “생각한 것을 그대로 해 보면 어때? 하지만 마지막에는 책임을 져야 해. 물론, 그래도 뭐,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책임을 지겠지만” 하고 떠받쳐 가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케다: 그렇게 학년마다, 이렇게 가르쳐 가고 싶다, 이렇게 길러 가고 싶다는 것을 선생님들이 차분히 정하고 있었던 것이군요.
이토: “학년회 방식”이라고 해서, 학년회 소속 교원들이 사전에 모여 이야기하고, 학년 방침을 정하는 일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는 여섯 학급이었기 때문에 담임은 여섯 명, 그리고 부담임까지 포함하면 학년 학생 약 160명을 이 열 명이 봐 간다는 의식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담임 한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면도 있었습니다.
다케다: 담임 선생님과도 끈끈했지만, 다른 반 선생님에게도 말을 걸기 쉬운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토: 이 방식, “학년회 방식”은 지금도 가끔 화제가 되는데, 당시에는 드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케다: 선생님이라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반 전체에게 사랑받는 선생님은 좀처럼 없잖아요. 누군가에게 사랑받아도,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토: 역시 다가와 주면 귀엽기는 하니까요. 다케다 군은 벽 쪽에 있는 이미지였지만요.
다케다: 지금도 옛날도 변함없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흐음” 하고 관찰하는 듯한 느낌이었죠.
이토: 맞아요, 맞아. 그래도 무대에서 성경을 소재로 콩트를 했던 것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케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십계”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호수 위를 걷는다”는 것을 합쳐서, 그리스도가 바다 위를 걷고 있었더니 모세가 바다를 둘로 가르고, 그리스도가 두 동강이 난다, 라는 소재를 했습니다. 저것을 예배당 무대에서 했다는 것은 “자유”가 지나쳤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이토: 다케다 군이 대학 졸업 후에 가와데쇼보신샤에 들어가 편집자로서 모교에 와 준 적이 있었습니다. 다초클럽의 우에시마 류헤이 씨를 데리고.
다케다: 어덜트 대상 시리즈 한 권으로 우에시마 씨의 책을 내게 되어, 권말에서 중학생과의 좌담회를 하게 해 달라고 해서요. 이것은 모교 중학교에 부탁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이토: 우에시마 씨가 “학생들을 놀라게 하고 싶다”고 청소도구함에 숨어 등장해 주었지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케다: 중학생에게 상담을 받는다는 설정이었던 우에시마 씨가, 최종적으로 중학생에게 상담하고 있었습니다. 우에시마 씨에게도 매우 인상 깊은 책이 된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변해 가는 학생들의 그룹
다케다: 이렇게 긴 교직 생활 속에서, 보호자와의 관계라는 점에서도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때는 어떤 느낌이었나요.
이토: 다케다 군 때의 보호자분들은 협조적이고, 보호자끼리도 사이가 좋았지요. 제 아들이 1985년생이라서, 다케다 군 일행의 보호자 세대는 조금 선배 어머니들이었죠. 소중히 대해 주셨습니다. 매년, 어떤 보호자분들과 접할지, 어떤 분위기일 지 알 수 없습니다. 큰일이죠. 보호자분들과 신뢰 관계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당시, 보호자회에서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교원과 보호자가 손을 잡아야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는 했습니다. 그래도, 어떤 선생님은 보호자회까지 학생의 일을 전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존경하고 있는 선배 선생님으로부터 “보호자회까지 학생 문제를 끌고 가지 마라. 보호자회 뒤의 학생은 완전히 다르다”고 배웠습니다. 보호자회 날에 귀가한 뒤 보호자분은 학생에게, 접한 선생님의 인상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좋으면 “좋은 선생님이구나” 하고 부모에게 전해진 신뢰가, 그대로 다음 날부터 학생을 바꾸고, 그렇지 않으면 보호자회가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보호자분들이 자기 아이만 보지 않게 된다는 것도, 문제 발생과 연결됩니다. 교사는 객관적으로 많은 아이들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 눈에서 보이는 일을 성의를 가지고 전하는 일이 요구됩니다. 자기 아이만을 보고 있는 보호자분이 “그런 일은 없습니다”라고 주장해서, 자기 아이를 지키려고 하면, 문제가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다케다: 객관적으로 보고 있으면, 그 반 안의 세력도라고 할까, “아, 쟤랑 쟤는 사이가 좋았을 텐데, 어쩐지 사이가 나빠졌구나” 같은 징후가, 선생님에게는 보이는 것입니까.
이토: 그런 것들은 날마다 느끼고 있었습니다. 특히 중1 여학생 그룹은, 아메바 모양으로 점점 그룹이 변해 갑니다. 담임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룹 구성원이 변화하는 것을 일지처럼 기록하고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다케다: 하지만 그 그룹에서는 성격상 맞지 않을 것이라고 선생님들은 예상이 가도, “당신, 친해질 사람을 잘못 잡고 있다고 생각해”라고는 말할 수 없지요.
이토: 물론 말할 수 없습니다. 지켜볼 뿐. 시간을 들여 울거나 고민하거나 하면서, 점점 자신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동료를 찾아갑니다. 대개 중3이 될 무렵에는 그룹으로서 안정되어 있었다는 인상이 남아 있습니다.
다케다: 반대로 말하면,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 자기 거처를 찾아내는 데는 그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이군요. 솔직히, 남자는 장난이나 괴롭힘이 있어서, 지나치게 장난치게 된다든가, 누가 누구보다 강한가를 시험하는 듯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표면으로 보이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중고 시절에는 여러 경험을 하면서 학생이 성장해 가는 시대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성장을 지켜보는,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예배 시간”에서 보이는 모습
다케다: 이토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셨지만, 모교는 영어교육도 앞서가고 있었죠. 기억나는 것은 영어회화 선생님이 자기 목소리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배포해 준 일. 그것을 반복해서 듣고 공부하라고 들을 뿐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라디오를 녹음하는 데 쓰고 있던 카세트테이프라서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하지만요.
이토: 저도 JAZZ CHANTS를 도입해서 편집한 교재를 더빙한 테이프를 배포했습니다. 도서관에 네 대 정도 동시에 녹음할 수 있는 기계가 있어서, 방과 후에 스스로 더빙하고 있었습니다. 별도의 것을 녹음해 버린 것은 유감이네요, 하하. 반대로 묻고 싶은데요, 다케다 군 일행에게 선생님들은 어떻게 보였습니까.
다케다: 중고 일관교라서, 다른 학교 선생님과 비교할 수 있는 경험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떤 선생님이 특별히 좋았다”라기보다, “선생님과 학생이 이야기하고 있는 풍경”을 잘 봤다는 감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이야기하고 있는 광경을 잘 보았고, 반대로 선생님 쪽에서 고압적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명령받는 광경은 보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지금 생각하면 매일 아침 예배도 학생을 아는 좋은 기회였지요.
이토: 맞아요, 매일 아침 8시 40분부터 예배가 있었습니다.
다케다: 매일 아침, 선생님이 10분 정도 이야기를 합니다. 일상적인 화제에서 들어가면서, 성서·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이야기로 이어져 갑니다. 당시부터 “어, 이 선생님 이야기는 재미있네”라든가, “아니, 그 흐름은 무리가 있겠지” 같은 느낌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에 의해 선생님의 캐릭터가 보인다고 생각하면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이토: 중고 각각 예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매일, 3학년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당연하지많은 않은 일입니다.
다케다: 예배 마지막에 연락 사항이 있는 위원회의 학생이 나와 말하면, “허어,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 학년 전체의 분위기, 학교 전체의 공기가 읽혔을 것 같습니다.
이토: 다케다 군 일행의 세대는 포켓 벨이나 휴대전화가 나오기 시작하던 무렵으로, 학년 분위기를 읽기 어려워졌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4월 입학 뒤 5월의 대형 연휴가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연락이 없으면, “오늘부터 다시 잘 부탁해” 하고 새로 시작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만, 연락을 주고받는 도구를 가지게 되고 나서, 연휴 중에 인간관계가 변하고 있는, 경우에 따라서는 관계를 망가뜨리고 연휴가 끝나는 것을 맞이하는 일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어려움은 계속되었습니다.
혼자 떠안고 있으면 무너진다
다케다: 지금, 여러 곳에서 “선생님이 힘들다, 일이 너무 바쁘다” 같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장시간 노동이라고 말해지는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토: 노동시간은 길었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저녁에 귀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뒤에는 점점 늦어져서, 관리직 초기에는 아침 7시에 집을 나와서, 밤 9시에 돌아가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시업 전에 보호자와 연락을 하거나, 수업 준비, 연수, 여행이나 체육제 같은 행사의 준비를 하기도 하다 보면, 늦을 때에는 집에 도착하는 것이 밤 12시 가까이가 되었습니다.
다케다: 이토 선생님은 부활동 고문도 하고 계셨지요.
이토: 테니스부 고문이었습니다. 다만, 테니스는 전혀 잘하지 못합니다. “달려라” “떠들지 마라”라고 말하고 있을 뿐. 아침 연습에 참여하고 있던 때는 아침 6시에 집을 나왔습니다. 코트 옆에서 작은 테스트 채점을 그대로 하고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아침밥은 가족 몫을 준비하면서 자기 것은 끝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아침밥은 기본적으로 앉지 않고 먹습니다. 좋지는 않지만, 습관이죠. 예의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습관이군요. 행사의 토요일도 시합 인솔이 들어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만 연구일이라고 부르는 휴일이 주에 하루 있었습니다. 그날에 병원에 가거나, 여러 용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계 학교이기 때문에 안식일인 일요일이 휴일. 부활동도 시합 이외에는 쉬어서, 주 이틀은 휴일이 있었습니다.
다케다: 부활동에만 한정되지 않고, 안식일에 도움받고 있는 몸에는, 안식일에 돕는 것 이외에는 쉬지 않는다는 것이, 선생님의 바쁨이라는 것은 계속되고 있었구나 하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겠죠. 학생들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훌륭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니까 죽을 만큼 바빠도 힘내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 환경에서 이토 선생님이,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은 힘들었던 것 아닙니까.
이토: 가족 친족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계속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아들들에게 “너희들, 반항기가 없었니?”라고 말했더니, “아니, 왜냐하면 엄마, 집에 없었잖아”라고 들었습니다. 관리직이 되어 새삼 느낀 것은, “담임 한 명으로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장을 하고 있을 때에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은, 한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보호자에게서 어려운 전화에 담임이 대응할 때에는, 가능하면 옆에 누군가 있도록 했습니다. 전화 대신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듣고 있을 뿐입니다만. 그리고 저도 때때로 법인 본부에 나가서 이야기를 듣거나, 필요할 때에는 고문 변호사와 상담하게 하거나 하고 있었습니다. 담임 한 사람에게 시켜서는 안 되고, 교장도 교장으로서 모두를 혼자 떠안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학생이 집단으로 있는 이상, 학교 측도 집단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즐기다
다케다: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학교에 있는 선생님이라는 것은, 학생이 보기에는 늘 건강했습니다. 무리해서 건강하게 있어 준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토: 모두에게서 에너지를 받고 있으니까요. 수업을 담당하고 있던 무렵에는, 아침 조금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가 되면, “어라? 아침보다 건강해졌네, 나” 하고 깨닫는 날이 자주 있었습니다.
다케다: 교장이라는 일은 이토 선생님에게 어떤 경험이었습니까.
이토: 전임교는 교장 후보를 먼저 선거로 뽑기 때문에, 모두에게 학급위원 같은 감각이 있었습니다. 교장이 되어 달라진 것은, 역시 다른 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만날 기회가 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앞으로는, 경영 면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공적 보조금을 위한 활동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저출생이 진행되는 가운데 학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등을 새롭게 배워 갔습니다. 지금은 NHK학원고등학교에서 부교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광역 통신제는 보조금의 경로가 달라서, 조성 금액이 작지만 이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하는 문제를 느끼고 있습니다. NHK학원고등학교에 근무하고 나서, 전일제 중고일관교에서는 접할 일이 없었던 다양한 학생들의 고등학교 생활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학생들이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는 일을 실현하고 있다. 통신제 고등학교의 존재 의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의 지원으로 학습하고, 때로는 상담사의 도움도 얻으면서 무사히 졸업해 가는 모습을 보면, 여기에서 행운의 만남이 있어서 다행이었네, 하고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다케다: 중고 6년간 즐겁게 지냈습니다만, 사회에 나가서 편집자나 작가로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역시 도쿄의 사립중학교에 들어오는 층이라는 것은, 꽤 한정적이고 동질성을 가진 집단이라는 점도 신경 쓰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부모에게는 안심 재료인 것이겠지요. 폭이 좁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생각합니다.
이토: 학교에 학생들이 있으면, 매일 여러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즐기는 듯한 사고방식이 내 안에는 계속 있었습니다. 학생과 마주 보며 대응해 가는 것은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다케다: 선생님의 긴 경력 속에서, 우리 세대가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이토: 제가 처음 학년 담임을 맡게 된 학생들이니까요. 그 학생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해 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가며
학생 시절 만났던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언제까지 지나도 재미있는 것입니다. 졸업하고 반세기가 지나도, 선생님을 앞에 두면 숙제를 시간에 맞추지 못하고 친구에게 보여 달라고 하고 적당히 해답란을 채운 날의 뒤가 켕기는 마음이 되살아납니다. 프로테스탄트계 학교에서 “성서”를 주제로 한 수업이 있고 테스트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답하면 좋을지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이웃 사랑”이라고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웃 사랑”이란 자주 듣던 말이었으니까요. 지금에 이르기까지 특정 신앙은 없지만, 이 “이웃 사랑”이라는 정신에 대해서는 자기 몸에 정착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늘 있습니다. 어제의 세계 정세와 언론 공간을 보고 있으면 자주 생각합니다. 이토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며 우리를 보고 있었는가, 반대로 우리 쪽이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며 보고 있었는가, 이렇게 부딪쳐 보는 일이 현재 교육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는 기회가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습니다.
[필자 소개]
1982년 도쿄 출생. 출판사에서 시사와 논픽션 분야의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다 2014년부터 프리랜서 작가가 되어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2015년에 데뷔작 『틀에 박힌 사회』 (아사히 출판사)로 ‘제25회 분카무라 두 마고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프랑스의 두 마고 문학상(Prix des Deux Magots)이 가진 자유로움과 독창성을 계승하고 있다. 2016년에는 일본어가 가진 아름다운 표현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찾아낸 작가들에게 수여하는 ‘나, 즉 Nobody상’을 수상하며 독창적인 작가로 자기매김하고 있다. 이 상은 전년도 수상자가 올해의 수상자를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다케다 사테츠를 추천한 사람은 어린이책 작가인 요시타케 신스케이다. 지은 책으로는 『연예인 관용론』 『콤플렉스 문화론』 『일본의 기색』 등이 있다.
[옮긴이 소개]
방치완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3학년 재학 중이다. 일본어 통번역 및 다양한 일본 문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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