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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디어 번역과 해제

읽고, 보고, 듣고: 서점 ‘카니 북스’에서 맞이한 겨울의 기록

by memo91120 2026. 6. 22.

하나다 나나코(花田菜, 서점 카니 북스점주)
옮긴이 임유진
출처 『世界』 SEKAI 2026.03

 


실제 서점 '카니 북스'(蟹ブックス), https://brutus.jp/post-183499/

 

 


 도쿄 고엔지(高円寺)라는 아늑한 동네 한구석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흔히 '동네 서점 주인'이라고 하면 따뜻한 조명 아래 카운터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는 평온한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나 역시 그런 낭만적인 시간을 간절히 바라며 늘 기회를 노리지만, 현실은 야속하리만큼 엄혹하다. 밀려드는 입고 업무와 택배 발송 작업, 산더미 같은 잡무와 메일 회신에 치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허망하게 저물어 버린다. 휴일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도 아니다. 갤러리 전시를 기획해 설치하고, 강연회 자료를 만들고, 대담 업무를 조율하다 보면 휴일마저 모래알처럼 스르륵 사라지기 일쑤다.

 

  이런 생활을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까 싶어 피로가 어깨를 짓누를 때쯤, 기적처럼 아무런 계획도 없는 오롯한 하루가 찾아왔다. 오직 종일 책만 읽을 수 있는 단 하루의 휴일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손에 쥔 책은 출간만을 목 빠지게 기다려 온 우치코시 마사유키(打越正行)의 『오키나와 사회론: 주변과 폭력』이었다. 안타깝게도 저자는 2024 12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황망히 세상을 떠났고, 이 책은 그의 유고집이 되었다. 오랜 팬이었던 만큼 어느 때보다 경건하고 진중한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그의 대표작인 『양키와 고향』은 오키나와 불량 청소년들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저자 스스로 그들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기록이다. 왜 오키나와의 청년들이 빈곤과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 명저이기도 하다. 이 무모하고도 참신한 밀착 조사 덕분에 저자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삶을 바라보며 오키나와라는 사회가 품은 깊은 주름을 선명하게 포착해 냈다. 대상을 바라보는 성실하고도 확고한 시선은 사회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일반 독자의 마음까지 세차게 흔들었다. 신간 『오키나와 사회론』 역시 그 청년들의 '그 이후'를 쫓는 속편이자 보충 성격의 글이지만, 유고집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서글픈 감정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연구가 가야 할 길이 아직 한참 남아 있었는데 얼마나 원통했을까,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이토록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이가 왜 이리 허망하게 가버렸을까, 그래도 그는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책은 독자에게 그의 삶을 온전히 추모하고 애도할 시간을 허락한다. 책을 덮으며 바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 깊이 차올랐다. 여기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그저 무해하고 무난한 선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저자처럼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의 나지막한 외침을 세상에 건져 올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삶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오키나와 사회론』이 남긴 묵직한 여운을 마음에 품은 채 서점으로 출근했다. 오늘이야말로 가게가 한산할 테니 올해 마지막 원고를 기필코 여기서 끝내리라 비장한 각오로 서점 문을 열었을 때, 커다란 봉투 한 통이 나를 맞이했다. 출간을 앞둔 후지타니 치아키(藤谷千明)의 신작 원고, 『사람이 그리워 여성용 풍속에 간 뒤 생각한 돈과 돌봄과 욕망에 대한 것』의 서평용 가제본이었다. 굳이 지금 당장 읽어야 할 의무는 없었으니 일단 밀어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호기심에 첫 페이지를 들쳐본 것이 화근이었다. 날카롭고 흥미진진한 문장에 순식간에 매료되어 도저히 책장을 덮을 수 없었고, 정작 써야 할 내 원고는 안중에도 없어져 버렸다.

  저자는 40대 여성 라이터다. 데이팅 앱을 전전하며 연인을 찾는 과정에 환멸을 느끼고 우연히 여성 전용 성인업소를 이용하게 되지만, 이내 자신이 남성 성노동자를 착취한 것은 아닐까 하는 깊은 고뇌에 빠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왜 여성이 성인업소를 이용할 때는 구구절절한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반면 남성의 이용에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지 의문을 품는다. 동시에 남성이 업소를 찾는 행위가 정말로 단순히 성욕 때문만인지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파고든다.

  저자는 욕망과 착취, 그리고 공정이라는 키워드를 축 삼아 자신의 생생한 경험과 과거의 기억을 엮어내고, 유흥업소 종사자들을 직접 취재하며 의문의 핵심을 추적한다. 체험담과 인터뷰라는 치열한 연구의 영역과, 이 책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두고 편집자와 나누는 지극히 사적인 대화가 교차 배치되어 있어 마치 한 편의 흡입력 있는 로드무비를 보는 것처럼 독자를 빨아들인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조사 과정에서 보여준 저자의 집요함이다. 여성용 업소는 직접 겪었으니 쓸 수 있지만, 남성용 업소는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글을 쓸 수 없다고 판단한 저자는 주변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성인업소에 취업해 일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주변 지인들처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고개를 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장에서 온몸으로 느낀 감각을 인터뷰를 통해 날것 그대로 부딪치는 그녀의 모습에, 취재원들은 처음에는 경악하다가도 이내 기묘하고도 단단한 신뢰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녀가 단순히 취재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현장을 보지 않으면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직업적 소명이 그녀를 움직였으리라. 원고의 무게감을 채우기 위한 얄팍한 타산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득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또 한 사람, 『오키나와 사회론』의 우치코시 마사유키가 겹쳐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알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동력 삼아 극단적일 만큼 치열한 조사 방법을 택했고, 결국 아무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결론의 길을 개척해 냈다. 후지타니 치아키 역시 욕망과 사회, 그리고 돌봄의 상관관계 속에서 그 누구도 닿지 못했던 실체적 진실의 핵심에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우치코시 마사유키가 심부름꾼 청년들과의 활동에 20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을 바쳤듯, 후지타니 치아키에게도 스스로 선택한 거친 실천 속에서 기꺼이 상처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무엇에 상처받을지, 혹은 무엇을 의연하게 버텨낼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본인에게만 유효하다.

  예정 외의 독서로 허비해 버린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초인적인 속도로 내 원고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비로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한 해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책을 집어 들었다. 가와노 메구미(川野芽生)의 『A는 아섹슈얼의 A: '연애'로부터 멀리 떨어져서』였다. 타인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아로맨틱이자 성적 욕구를 느끼지 않는 아섹슈얼 당사자가 쓴 에세이다. 앞서 읽은 후지타니 치아키의 책과는 언뜻 극과 극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본질적인 지점에서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당신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그 '욕망'이라는 감정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마치 외계인이 지구인의 기이한 생태를 관찰해 스케치하듯, 지극히 이성적이고 정연한 논리로 연애 중심주의 사회를 해체해 나가는 문장들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마치 최고급 헤드 스파를 받는 것처럼 뇌리에 문장들이 맑게 꽂히는 기분이다. 다루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터져 나오는 깊은 공감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지독하리만큼 달콤하고 치유적인 독서 시간이었다.

  연애야말로 인간의 도리이자 정의라거나, 사람이라면 사랑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시선, 혹은 네가 아직 진정한 사랑을 몰라서 그러는 거라는 말들.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정당하며 사회적 기대를 강요받아야 했던 이들의 서러운 고통과, 누군가의 호의를 받는 것 자체가 숨 막히는 부채감으로 다가오는 섬세한 감각들을 책은 날카롭게 포착해 낸다. 동시에 어쩌겠어 좋아하게 돼버린 걸, 혹은 남녀 사이가 원래 다 그런 거지라는 핑계 뒤에 숨어 상대의 선을 넘는 무례한 행위들을 정당화해 온 이들을 논리 정연하게 격파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파(論破)'라는 단어는 반지성주의적인 조롱과 공격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불쾌함을 줄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실로 오랜만에 지성과 품격을 갖춘 '아름다운 논파'를 온몸으로 만끽하는 전율을 느꼈다. 서점원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문장들은 없었다.





저자 소개

하나다 나나코(花田菜)

1980년대생 일본의 서점인·서평가로, 도쿄 고엔지(高円寺)에서 독립서점 「蟹ブックス」를 운영 중이다. 출판사 근무를 거쳐 서점을 개업했으며, 독서와 출판 문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와 서평을 꾸준히 집필하고 있다. 서점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독서 에세이와 서평을 연재한다.



 

옮긴이 소개

 

임유진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일본의 역사와 사회,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문학과 영화, 저널리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사회 문제를 탐구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다.


2024110232 임유진 동아시아미디어론- 읽고, 보고, 듣고 (번역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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